보은세 報恩稅무섭게 덥던 그 여름이 어느 날 감쪽같이 물러가고, 서울에서도 요즘 아침저녁으로는 다소 차다 싶을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니 풋가을의 정취가 느껴진다. 십수 년 해온 일이지만, 대학의 개강을 준비하면서 필자는 나름의 긴장도 하게 되는 시점인데, 게다가 또 며칠 전 집안에서 있었던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지난 월요일 큰 아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들녀석이 출국하기 전날밤 모처럼 부모와 두 아이가 한자리에 모였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미로서 나는 아들들에게 매우 섭섭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공항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게 처음 일이긴 하였지만, 밤새 생각을 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고 결국 나는 목이 붓고 열이 올라 육신이 아픈 몸살을 며칠 동안 앓게 되었다.
자식들은 그 사이 대학을 거쳐서 군대를 마치고 큰 녀석이 26세를 넘었으니 이제는 뭐든지 알아서 할 수 있게 되었지 싶어도 종종 실망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금년 들어서 처음으로 나는 자식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는 돈 중에서‘보은세’를 내라고 요구하였다. 세율은 10% 정도로 정하였는데 지난 5개월 동안 두 녀석이 한번도 그 세금을 내지 않고 탈세를 한 것이다. 하필이면 출국 전날 밤에 내가 그‘보은報恩’문제를 거론했던 것은 마침, 조카가 공부하러 간다는 이유로 나의 친정식구들이 격려금을 모아 아들에게 주었던 터라서 그런 주위 친지들의 은혜를 잊지말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하던 참이었다.
그때 아들 녀석들이 나의‘보은세 요구’와 관련하여 말하기를, 저희들의 친구네 부모님 중에는 엄마처럼 보은세를 내라 한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노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남의 부모님이야 어찌들 하시건 간에,‘ 보은세’는 이 집 부모의 철학이고 신조인데 무슨 말이냐고 나는 따졌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니‘녀석들이 이렇게 나이를 먹었어도 부모의 속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철이 없는 것은 결국 부모인 우리가 자식을 잘 못 키운탓’이 분명하였다.
우리의 가정생활이라는 게 그다지 풍족하지는 않아도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은 없도록 부모가 제 자식들을 우선적으로 돌봐주었던 결과, 그게 자식들로 하여금 저만 잘 하고 살면 되는 줄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모가 미성년 자식을 돌보는 것이 당연하듯이 성년이 되면 자식도 부모를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 성년의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부모의 뜻을 헤아려 알아차리는 것이 그 중요한 하나에 속한다.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이 어느 정도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오고 있는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되어 대단히 낙심하였다. 그 밤에 문득 유학이고 뭐고 아들녀석을 그냥 그대로 보내면안 될 것 같아서,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잠도 오지 않았다. 물론 이튿날 녀석들이‘생각이 짧았어요. 죄송해요. 감사해요’라는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오기는 하였지만, 나는 아직도 깊이 생각중이다.
통계청 자료(2006)에 의하면 우리의 해외유학생 수가 약 19만 명이라는데, 인구비례로 따져볼 때 외국의 어느 나라들보다도 높은 교육열의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프던 시절부터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가르친 덕에 대한민국이 소위 정치·경제의 근대화가 이만큼 이루어진 것이라고, 어느 자리에서 강연자는 강조하였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 많은 유학생들 가운데는 부모가 제 자식에게‘너 하나만 공부 잘 하고 출세를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는 심정으로 밀어준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왕왕 자식들이란 저희끼리만 잘 살면 다 되는줄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필자가 말하는‘보은세’란 나와 내 자식들과의 사이에서만 필요한 요구가 아니었다. 내 자식들이 이만큼 자랄 때까지 나는‘내 자식’만을 돌보느라고 저 밖에‘우리 사회의 자식들’이 헐벗고 굶고 못 배우고 하는 문제들을 충분히 살피지 못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이제라도 다 큰 아들녀석들이 일을 해서 소득이 생기면 일부는 되돌려 받아가지고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곳에 좀더 많은 관심과 후원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우리 집 아이들이 적당히 배우고 적당히 취직을 해서 제 몫의 소득이 생기면 반드시, 그날이 오기까지 고맙게 도움을 주신 세상의 여러 인연들을 위해서 회향을 하는 게 당연한 도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런 회향을 하도록 가르치고자 나는 내 자식들에게 보은세를 징수하려는 것이다.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면 부모들이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 사실 우리 주위 여기저기서 알려지는 바에 의하면,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로 크게 출세를 한 분들보다도 더 훌륭하신 부모님들이 많이 계신다. 형편에 따라서 불우이웃돕기에 동참하고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자원봉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어른들이 많아지고 있다. 자원봉사 또한 보은세를 내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평생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자녀를 키우면서 가족의 생계를 지켜왔다면, 이제 생애 후반부의 얼마간은 그 직업적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보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함께하고 있는 우리 불교NGO에서 이런 회향운동을 실제로 하고 있다. 날마다 혹은 달마다 여가시간의 3%, 소득의 3%를 이웃에게 보시하고,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이웃의 행복을 위한 명상기도의 시간을 할애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유산의 1% 회향도 포함된다. 소위‘HAPPY TIME’운동이 그것이다. 이런 일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불제자로서 가장 기본적인 실천행이라고 생각한다.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 지은보은知恩報恩의 실천은 불교의 근본인 연기법緣起法과무아無我와 무소유無所有와공空등의 도리에 회통會通하는 거룩한 수행修行이라고 믿는다.
이혜숙님은 동국대 불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바사과정을 밟고 있다. 미국 캔자스 대학교 사회복지학부 방문연구원, 서울시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서울가정법원 가사조정위원, 사단법인 불교아카데미 이사(煎 원장),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