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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좀 데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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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원 만 2008년 08월 318호
\"나도 좀 데려가세요\"
원만/김천 수도암 감원

서른아홉에 출가를 해서 마흔에 계를 받았다. 늦깎이 행자인 나를 강원 스님들은‘노행자’라고 불렀고, 성철스님께서는‘너, 손자가 몇이고?’하셨으니 어지간히 나이가 들어 보였나보다.

대학에 다닐 때, 방학만 되면 전국의 절을 찾아다녔다.
절에 가면 좋았는데 인연이 빨리 이뤄지질 않은 걸 보면 결단력이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출가를 결정하고 다시 전국의 절을 다녀 보았다. 해인사가 가장 끌렸다.
출가를 하면 입을 옷을 개인이 준비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속가에서 입던 옷과 내의 등을 한 박스 준비해 가지고 갔는데 그렇게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옷을 한 짐 지고 해인사에 들어서자 아는 스님을 만났다. 동국대를 함께 다녔던 동욱 스님이었다. 해인사 재무 소임을 보고 있던 동욱 스님은 출가승으로 승가학과(지금의 선학과)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인도철학과에 다녔다.
“너, 여기 뭐하러 왔어?”
“출가하러 왔습니다.”
스님은 믿기지 않는 듯 하룻밤 자고 내려가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출가의 결의를 심각하게 이야기하자 그때서야 원주실에 연락을 해주었다. 곧 행자 한 사람이 나를 안내하러 왔고 나는 그렇게 출가 사문의 길로 들어섰다.

해인사엔 행자가 열다섯 명쯤 오면 계를 받을 때엔 한 명 정도 남는 게 통례다. 그만큼 세간으로 많이 돌아간다. 그래서였는지 상행자들 모두 나도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나이도 많았으니 강도 높은 해인사 행자 생활을 못 견디고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어차피 갈 사람이니까 해인사가 어떤 곳인지 보여주자’, 그렇게 결의하고는 본디 두 명으로 배당되는 채공소임을 나 혼자 보게 했다. 동작이 느려서 채공살이를 하는 동안 물건을 들고 뛰어다녔더니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다. 사십 평생 살면서 물집이 생기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달 동안 그렇게 강행군을 시켜도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하루는 상행자 한 사람이 불렀다. 돌아갈 줄 알고 일을 되게 시켰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더니 보조 두 사람을 붙여주었다. 일을 혼자 하다가 세 사람이 하니까 할 게 없는 것 같았다. 남은 동안은 편안하게 보냈다.

그런데 계를 받을 때가 되었는데 은사스님을 정하지 못해 걱정이었다. 아무도 데려가는 사람이 없었다. 옆에 있던 다른 행자들은 강원스님들이 와서 사제를 삼으려고 데려가는데 나에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강원스님들을 찾아가 부탁했다.
“나도 좀 데려가세요.”
“노행자님은 안돼요.”
나이 많은 사제가 들어오면 자신들이 불편하다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원주스님은 자꾸 은사를 정하라고 하는데 정말 난감했다.
그때였다. 마당에서 자꾸 한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마지 올릴 것을 준비해서 마당을 지나 법당에 올라갈 때면 마주치게 되는 것이었다. 조용한 분위기에 키가 자그마한 분이었다. 합장을 하고 인사를 드리면 스님께서도 꼭 합장으로 답례를 해주셨는데 어쩐지 다른 스님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 전에는 한번도 만나지 못한 분이었다. 행자 때는 앞만 보고 다니니까 더 낯설었을 것이다. 먼저 온 행자에게 물었다.
“저분이 누구세요?”
해인사 주지스님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뒤로부터 더 자주 뵙게 되는 것이었다. 심부름을 갈 때 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공손히 합장을 했는데, 나의 합장을 꼭 받아주고 지나시는 스님을 뵐 때마다 마음이 환해졌다. 마음이 그분에게로 갔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께 계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니 더 자주 마주쳤다. 멀리 지나가시는 것만 보아도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걱정되던 마음이 훈훈하고 든든해졌다.

그런데 알아보니 이미 주지스님은 두 명의 행자가 상좌로 정해져 있다고 했다. 고민 끝에 주지스님의 시자로 있는 스님을 찾아갔다.‘ 주지스님께 계를 받고 싶으니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주지스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은사가 되신 분이 지금 해인총림 방장으로 계신‘법法’자‘전傳’자스님이시다.

계를 받고 나자 은사스님께서 물었다.
“강원에 갈래?”
“저는 수도암으로 바로 가고 싶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해인사로 가시기 전에 폐사가 되 다시 피한 수도암을 중창해 놓으셨다. 지금은 전국의 수좌들이 가장 선호하는 선방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선방이 되었다.
강원에도 가지 않고 들어온 수도암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전생에 인연이 많은 도량인 것 같다. 수도암에 살면서 원주 소임을 3년, 감원 소임을 5년 동안 보고 지금 다시 감원소임을 보고 있다.

은사스님께선 늘‘너희들이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었으면 세 가지, 즉 참선과 포교와 대중외호(절살림) 가운데 하나는 하고 살아야 밥값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스님들이 참선공부를 잘하고 신도님들이 기도를 잘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을 수행으로 삼으면서 살고 있다. 이런 나를 보고 신도님들이 오셔서는‘공부하는 스님들 뒷바라지만 하고 스님은 언제 공부하셔요?’하는데, 나는 이렇게 사는게 좋다.

재작년 3월에 만행하고 돌아와 한번도 수도암 밖을 나가지 않고 지내고 있다. 새벽예불에 빠지지 않고 더러 낮에 잠깐 대구나 김천에 나가 볼일을 보고 오는 것 말고는 절에만 있다. 결제하면 아침 공양은 꼭 선방스님들과 함께 하고 사시 예불에 들어간다. 해제 때도 나가지 않는 나를 보고 곁에서‘절 떠갈까봐 나가지 못하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나는 수도암에만 있는게 좋다.

수도암에 들어와 처음 원주 소임을 볼 때다. 가끔 수도암에 들르시는 은사스님께 삼배를 올리면 얼굴 한번 보시고는‘나가 봐라’하시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2년쯤 되어갈 때쯤이었을 것이다. 차츰 은사스님께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원만이 너, 원주 사느라고 애먹는다’라는 그
한 말씀만 좀 해주시면 신심을 내서 더 잘하겠는데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내 딴에는 열심히 산다고 사는데 그 한 말씀을 안해주셔서 좀 섭섭한 마음이 올라오고 있던 어느 날, 문이 탁 열리면서 은사스님이 들어오셨다.
‘앉아봐라’하시더니 내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신 듯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사중에서 호롱불을 켜면 개인 돈으로 산 호롱불은 위에, 사중 돈으로 산 호롱불은 아래에 놓았다. 개인 기름이 아래로 흘러내리면 사중 것이 되어서 괜찮지만 사중의 기름이 개인 것으로 흘러내리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공심公心을 가지고 일해라. 선방에 가서 좌복에 앉아야만 공부가 아니다. 원주를 잘 사는 것도 다 공부다. 공심으로 열심히 살아라.”
그 말씀만 하시고는 일어서서 나가셨는데,‘ 내 마음을 스님께서 다 알고 계시는구나’하는 생각에 부끄러웠으나 한편 기분이 참 좋았다.

지금도 은사스님께서 오시면 언제나 말씀이 없으시다. 묵묵히 공양을 하시고 묵묵히 도량을 거니신다. 나도 말이 없다. 스님께서 와 계시면 수도암 기운이 다르다. 훈훈하고 든든하다. 저 행자시절 만나뵈면 그리 마음이 좋았던것처럼.

얼마 전에 선방에서 정진하고 계시는 스님 두 분이 아침 공양을 마치고 부엌으로 왔다. 설거지를 좀 도우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그렇게 따스해져 올 수가 없었다. 공부하는 스님들을 잘 모셔야겠다는 마음이 새삼 들었다.

내가 원주 소임을 보면서 이곳 수도암엔 신도분들을 위한 정기법회가 없다. 기도 정진하러 오는 분들이 있을 뿐이다. 그분들에게‘오늘이 마지막 기도인 것처럼 정진하라’고 말씀드린다. 나도 날마다 그렇게 정진하려고 노력하며, 이곳 수도암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