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여름은 머무름이다.
장마라고 했는데 비는 오지 않고 개울물은 자꾸 말라 간다. 아이들이 오면 물장난을 제일 좋아하니 오늘은 새벽예불을 마치고 포클레인으로 간이 풀장을 만들어야겠다.
이제는 햇살이 나오면 더워서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 서둘러 제초도 하고 풀도 뽑다 보면 오전이 지나간다. 잠깐 바깥일을 보고 휴가 오는 아이들의 체험을 위해 감자밭도 정리를 해야 한다. 감자 순을 낫으로 치우고 멀칭한 비닐을 벗겨내면 아이들이 호미를 들고 캐기만 하면 된다. 고랑 계산을 해서 다음 주에 오는 아이들의 몫은 남겨 놓는다.
두 손으로도 잡을 수 없는 큰 감자에 신이 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봄날의 씨 뿌렸던 시간이 언젠가 싶다. 감자 캐는 아이들과 함께 조용한 산골 절이 분주해진다. 한번만 더 해보겠다고 떼를 쓰기도 하고 집에 가져가겠다며 몇 개를 더 달라고 하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하루 종일 이어진다.
아이들과 처음 인사를 하는 날, 재미있게 기억해주길 바라면서 이렇게 인사를 하곤한다.
“나는 주지스님인데 여러분이 볼 때마다 이렇게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멋쟁이 성민스님 안녕하세요.”
“…….”
“자 한번 해 볼까요,이렇게 합장하고.”
“멋쟁이 성민 스님 안녕하세요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멋쟁이 스님인 줄…….”
산길을 걸으면서도, 멀리서 일하는 모습만 봐도, 멋쟁이 성민 스님 안녕하세요오 손을 흔들어주는 아이들. 일년 중 유일하게 내가 멋쟁이가 되는 시간이이 여름철이다.
돌아가기 전날에는 트럭에 아이들을 모두 태우고 뒷마을까지 구경을 간다. 아이들이 가장 신나하는 시간이다. 하긴, 선생님들이 더 신나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돌아가는 날, 모두를 한 번씩 안아주면 아이들이 오히려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안아주는 것이 느껴진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러니 여름을 비울 수 없다. 여름 한철 나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맞고 보낸다.
또 다른 어린이집 아이들이 한 바탕 소란을 떨고 돌아간 뒤, 남은 적요를 고마워하며 방을 치우고 이부자리를 정리하다 보면 백중이 얼마남지 않았다. 49일 기도 입재가 어제였는데 벌써 여름은 지나가고 귀뚜라미가 온 도량에 뛰어다닌다.
모두가 휴가를 떠나는 여름이지만 나에게 있어 여름은 머무름이다.
옥수수 익었나 살펴보며 간식 챙겨주고 살구 함께 주워 나눠 먹으면서 작은 추억을 만들고, 호두도 은행도 배나무도 저렇게 열매를 맺는다고 이야기해주는 머무름이다. 종교를 떠나 아이들에게 자연의 숨결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면 내 머무름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절도, 스님도 낯설지않 게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는 관용으로 세상을 포용하리라. 이런 따뜻한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까닭에 내 작은 공간이 여름한철 소란스러운 것도 참을 수 있고 분주한 기다림이지만 기다려지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휴가 오는 사람 붙들고 풀 뽑게 하는 것이 내 여름나기임을 살짝 고백해야겠다. 산골에서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다 보니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일손으로 보여 미안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열치열이라 땀흘려 함께 일하고 난 뒤 차 한잔 나누는 것도 행복한 일이고 어디서고 땀 흘리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가슴에 새기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잠깐 머물다 가는 인연도 그렇고 오랜 시간 머물다 가는 분들에게도 백락사의 여름이 행복한 추억이었으면 좋겠다. 감자 캐는 농부의 땀방울과 고추 따는 시골 할머니의 땀흘림이 쉬운 일이 아니며 세상은 모든 분들의 수고로움 위에 굴러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스스로도 어느 자리인가 자기 자리에서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대우 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새삼 느끼며, 내 작은 바람 중의 하나, 한 사람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일락一樂이고 나중에는 백락百樂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
여름은 언제나 짧다. 인생도 여름 같은 날은 짧으리라. 그러나 떠날 수도 있고 머무를 수도 있지만 땀 흘린 이의 고마움을 헤아릴 수도 있고 내가 흘리는 땀방울이 얼마이던지 어느 자리에서건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다면 이 여름도 짧다고만 할 수는 없으리라. 하물며 기다림도 행복이고 떠나보냄도 행복일 수 있는 머무름이 어디 그리 많을까? 길을 떠나지 못한 섭섭함도 못내 감사함이 되어 내 자리를 돌아보는 행복함, 부처님 도량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떠난 빈자리를 갈무리하느라 어느 누군가가 수고하는 것처럼 내 머무름도, 맞이함도, 멋진 여름휴가이리라. 여름이 끝날 무렵 나 또한 길을 나서면 많은 사람에게 신세 져야 하는 것처럼 이 여름의 의미들이 가슴에 남아 있기를 바래본다. 어린이집 아이들의 편지가 그림과 함께 왔다.
“ 스님 내년에도 트럭 태워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