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 스님 받아 보세요.
저는 가겠습니다.
가는 이유는 저가 여기 살기 실어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중생들이 나고 죽으면서 한없는 고통을 받기 때문에 내가 깊은 산중에 사람 안 다니는 적적한 곳에 가서 공부해서 성불해서 이런 고를 벗어나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죄를 짓기 전에 일찍이 가서 생사生死 걸고 공부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냈습니다. 저가 만약 성불하지 못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성불하고 하겠다는 생각을 내고 갑니다. 그럼 저가 오면 성불한 줄 아시고 안 오면 못한 줄 아십시요. 마치겠습니다. 그럼 스님 몸조심 하면서 공부 잘 하셔서 성불 하십시오.
원인이가 스님께 글을 올림니다.
1970년 4월 15일 원인.
여기 있는 물건은 스님도 하시고 남 주십시오.
원인圓印이 법전法傳 스님께.
삼십여 년이흐른지금도이 편지(원문 그대로의)를 읽으면 웃음이 나온다. 열다섯 살의 행자시절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열네 살에 출가를 해서 다음해 은사스님인 법전 노장님을 따라 김천 수도암으로 갔는데, 깊은 산중에서 은사스님과 함께 지내다가 그야말로 더 적적한 곳에 들어앉아 힘찬 정진을 해서 생사윤회의 고통을 벗어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했던 것이다. 편지를 써서 은사스님의 편지 소쿠리에 넣어두고 수도암 위 불령산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땐 꽤 산 위로 올라간다고 간 것이 수도암에서 한 몇 백 미터 위였다. 좌선하기에 알맞은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들어앉았다.
그러나 언제고 성불하기 전엔 내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은사스님께 편지까지 써놓고 간 나는 다음날 오후에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성불할 때까지 홀로 있기엔 밤이 되자 산속은 너무 무섭고 추웠기 때문이다.
캄캄한 어둠속, 숲에서 들려오는 짐승들의 울음소리는 어찌 그리 큰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동굴 속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무’자 화두를 들었다. ‘개에게 왜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하고 화두를 들다보니 자꾸 개 생각이 나서 더 무서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뜰앞의 잣나무’로
화두를 바꾸어 보았더니, 조금 덜 무서운 것 같았다.
성불할 때까지 내려오지 않을 결심이었으니까 먹을 것을 조금 준비해 갔던 것 같은데, 혼자 불도 없는 동굴에서 무엇을 해먹을 수 있었겠는가. 시간이 흐르자 배도 고파왔다.
나중에 들으니, 날이 어두워져도 내가 돌아오지 않자 은사스님은 동네사람들을 풀어 산속이며 온 동네를 뒤지게 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곳으로 갈 아이는 아닌데’하면서 걱정하시던 스님은 밤이 깊어지자나를 찾는 것을 포기하시곤 방으로 들어오셨는데, 내가 써 놓고 간 편지를 보시곤 조금 안심하셨다고 한다.
다음날 저녁쯤에 무안한 마음을 억누른 채 절로 내려오면서 엄청난 꾸짖음을 당하리라 생각하고 무척 얼어있었는데, 은사스님께서 아무 말 않으시고 나를 끌어안으셨다. 예나 지금이나 감정 표현도 잘 안하시고 말씀이 없으신 스님께서도 많이 놀라셨던 것 같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도를 닦겠다고 산꼭대기로 올라갔으니 혹시 산속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고 얼마나 걱정을 하셨겠는가.
당시 은사스님의 연세가 사십대 중반이셨다. 그때 스님의 나이를 훨씬 넘어 상좌를 둔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아찔한 일이었다. 그 후로 수도암에 스님들이 오시기만 하면 나를 가리키며,‘ 네가 성불한다고 산으로 올라갔다가 하루 만에 내려온 놈이냐?’하시면서 놀려대는데, 무안해서 그때마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은사스님께선 어린 나이에 스스로 출가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당신을 찾아온 나를 무척 아껴주셨다. 어릴 때 행자교육이 출가의 길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계신 은사스님의 교육은 엄격하고 철두철미했다. 내 걸음걸이, 말 하나에도 신경을 쓰시면서 가르치셨다.
당시 수도암엔 은사스님과 나, 공양주 보살님 이렇게 셋이서 단출하게 지냈는데, 어느 날 한 스님이 은사스님께서 그곳에 계신 걸 알고 찾아왔다. 그런데 그분이 주위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 같았다. 은사스님께선 그분의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이르셨다. 혹시 어린 내가 그분에게 어떤 좋지 않은 영향이라도 받을까봐 걱정이 되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스님은 법당에서 기도를 하거나 예불하고 돌아오는 나를 방으로 부르곤 했다. 식구가 너무 단출해서 적적하던 차에 그분이 부르면 방으로 들어가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는 했는데, 그럴 때면 단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밖에서‘원인아!’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몇 번 그런 일이 되풀이되던 끝에 하루는 내가 꾀를 내었다. 밖에서는 알지 못하게 신발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5분도 안 되어서 나를 찾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스님께서 몽둥이를 들고 서계셨다. 꾀를 써서 나가는 척하다가 밖으로 도망쳤는데, 스님께서 이번엔 작정을 하신 듯 몽둥이를 버리고 쫓아오시는 게 아닌가. 본디 걸음이 빠르신 은사스님께 결국 잡히고 말았는데 은사스님께선 누그러진 목소리로‘산에나 올라가자’고 하셨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산에 오르면서 스님께서‘너, 어디 숨어 있었니?’하고 물으셨다. 성불하리라 들어가 있었던 동굴을 가리키자‘흐흠, 제대로 숨어 있었구나’하시더니 더 올라가보자고 하셨다. 전망 좋은 곳에 올라 앉으셔서 그날 은사스님은 나를 다시 타이르셨다.
“네가 나쁜 사람이 될까봐 그 스님에게 가지 말라고 한거다. 다시 들어가지마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던 내가 그래도 안심이 안 되셨는지, 결국 은사스님께선 그 스님을 다른 곳으로 보내셨다. 그렇게 은사스님은 일거수 일투족 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살피시며 반듯한 수행자가 될 수 있도록 이끄셨다.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나이에 출가한 나를 그렇듯 철두철미하게 노장님께서 관리해주지 않으셨다면, 저 어린 시절 간절했던 초발심에서 물러서지 않고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해인사에서 은사스님을 처음 뵈었다. 은사스님과 친분이 있던 아버지를 따라 간 나에게 은사스님은 그러셨다.
“너, 6학년 졸업하고 여기와서 중 되어라.”
은사스님께서 무심코 던진 말씀 한마디가 그렇게 가슴에 쿡- 박혀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졸업을 하고 바로 스님을 찾아갔다. 지금도 생생히 생각난다. 물어물어 은사스님을 찾아간 퇴설당에서 노장님을 뵙고는‘출가하러왔습니다’하는 나에게 성철 스님과 일타 스님께서‘법전 수좌, 상좌 될 사람 와서 좋겠네’하시면서 놀리던 모습이 말이다. 이미 두 어른은 안 계시고, 어린 행자가 심심할까봐 통을 만들어 수도암 연못 위에 띄워놓고 놀게 하셨던 나의 은사께선 어느 덧 팔순이 넘으셨다.지금 나는 그 옛날 모든 추억이 서려 있는 수도암에 와 있다. 은사스님께서 머무셨던 정각에 머물면서 3년 결사에 들어 있다.‘ 무문관無門關’이라 써놓고 정진하는 것에 부끄럽지 않게 저, 순수무잡하고 간절했던 초발심으로 돌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