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을 바라보며 하늘을 날다 - 김현정그 많은 이야기를담기에는한 계절이 너무나 짧지 싶다. 한 계절이다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라도 허공 속의 헛 손질처럼 곧 사라져버릴 것이기에 계절은 또 사람은 그것을 무심코 쉽게 품는다.
그 이야기들은 아마도 나뭇잎 마다 그렁그렁 매달린 빗방울 보다 덧없고, 부서지는 파도 위로 일렁이는 물거품보다 아련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찰나 간에도 수만 번을 오가는 덧없는 생각과 서서히 밀려오는 범부의 가슴 속 아련한 감정들은 머물지도 않고 새겨지지도 않는다. 누군가 의기양양하게 돌을 깎아 세우고 그 위에 비망備忘의 이야기를 깊이 새겨놓아도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다가는 결국은 흩어져버리는 것이 세상이 정해 놓은 이치일터인데, 범부가 품었던 수만의 생각과 느낌들이 어떻게 여기 이자리에 영영 머물러 있었겠는가.
어느날 스승께서 번뇌가 많은 이 제자에게 물으셨다.
“‘있다’는 의미의 글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유有, 존存, 재在등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그렇다. 글자를 새겨보면 무릇 세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육신(肉)과 종자(子)와이대지(土)가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이것들의 작용으로 생겨나는 것이니 이것 이외의 것을 두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정말 그렇다. 이제껏 나는 있지도 않은 이야기와 망상만으로 하늘을 덮는 그물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있는 것들을 인연하여 생겨난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의 눈꽃들을 마치 실제처럼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달마 조사께서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켜 달라던 이조二祖혜가 화상에게 너의 마음을 가져오면 안심하게 해주리라던 그 가르침이 생각났다.
한편 조주 화상께서는 일찍이 대중들에게 불법을 보이기 위해 이렇게 설하시기도 하였다.《 조주록趙州錄》중권에 실린 법문이다. 어느날 조주선사가 법당에 올라 대중들에게 법문을 보이셨다.
“쇠 부처(金佛)는 용광로를 거치면 녹아버릴 것이고, 나무 부처(木佛)는 불에 타버릴 것이고, 진흙 부처(泥佛)는 물에 녹아 풀어진다. 참된 부처(眞佛)는 마음속에 있다. 보리나 열반, 진여 불성이 모두 몸에 걸친 의복과 같고, 역시 번뇌라고 할 수 있다. 의문이 없으면 번뇌도 없다. 궁극적인 실제 이치라도 어디에 둘 수가 있으랴! 망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은 허물이 없다. 단지 불법의 이치를 구명하기 위해 참선하라. 그렇게 수행하여 만약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한다면 노승의 머리를 잘라버려라!”
나라고 별다를까. 하루는 금불金佛을 만들어놓고 흡족해 하고, 나무로 부처님을 만들어 모시고는 그것이 부처라 여겼었다. 하지만 세상은 위태롭고 나의 도심道心은 참으로 미약하니 금빛 부처님은 하루가 되지 않아 그 빛이 바래고, 나무 부처님은 어느새 아궁이 속에서 재로 변하고 계셨던 것이다. 참된 부처가 마음속에 있다는 말을 두고 굳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것을 부처라할지 뭐라할지는 알 수 없지만그저 땅에서 넘어진자, 땅을 딛고 일어서 다시 걸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은 자꾸 허공속에 맴돌고 가슴은 과거에 묻혀 있다.
봉황을 타고 가는 선녀의 그림에 자꾸 마음이 가는 것은 아직도 그 하늘과 땅이 짜놓은 천라지망天羅地網 촘촘한 그물 자락속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남송대에 그려진 이 그림은 누가 그렸는지 알려져 있지는 않다.
봉황을 타고 날아가는 선녀의 모습은 구름이나 바람이나 얹혀서 훌쩍 날아가고 싶은 내 마음과 그렇게 부합할 수가 없다. 남송에 와서 시서화詩書畵의 기량이 눈에 띄게 높아지긴 하였지만 여기에는 도교적 성향이 더욱 가미가 된 것도 사실이다.
둥근 달을 바라보며 하늘로 날아가는 선녀는 태양의 자손인 오대 행성 중에 하나인 금성金星의 의인화한 모습이다. 금성은 태백성太白星, 장경성長庚星, 계명성鷄鳴星이라고 하였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초저녁이나 새벽 하늘 태양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빼어난 자태의 태백성을 보고는 아름다운 여인을 떠올렸던 것 같다. 서양에서는 금성을 아름다움의 여신인 비너스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 그림 이전에 당나라 시대 유명한 화가인 장언원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오성이십팔수도五星二十八宿圖>에는 선녀의 손에 비파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그림 속의 봉황은 장차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지 넓게 날개를 펼치고 있고, 그 위에 다소곳하게 앉은 선녀의 옷자락은 바람 결에 뒤로 휘날리고 있다. 비파는 어디에 있는지 선녀는 다만 계수나무 아래 옥토끼를 담고 있는 금빛 둥근 달을 그윽하게 바라본다. 달빛에 미련을 둔 듯한 선녀의 눈길은 그녀가 가야 할 곳과는 그 궤적이 다르고, 그 눈길과 방향을 같이 한 내시선은 왜 이렇게 안타까운지 모르겠다.
혹 선녀와 눈을 맞출까, 달빛에 몸을 담을까, 창밖으로 길게 목을 빼고 하늘을 살피니 가득하니 먹장구름이다. 후딱 지나가버린 봄과 제철을 잊은 듯했던 이 해의 초여름 자락을 밟고 이미 지리한 장마의 시작점에서 있는 것이다. 낼 모레면 태양이 가장 높이 오른다는 하지夏至라지만 그 높다란 태양을 저 구름속 어디에서 찾아야 될까심히 마음 불편하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아닐 것이니분명히 높이올라 여름철긴 하루를 더욱 길게 늘이고 있을 터였다. 아이고, 오늘밤 숲 저쪽에서 두견새가 제 솥 작다고 난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