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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 노인복지회관 관장 탄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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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정영 2008년 07월 317호
탄하스님 의성군 노인복지회관 관장 탄하스님


마을 아래에서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올려다 보니 볕 좋은 자리에 큼직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어디서봐도 참 잘 보인다.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을 것이니 언제든 누구라도 찾아오라는 듯하다. 그러니 까막눈인 노인이든 길눈 어둔 노인이든 찾아가는게 그리 어렵지는 않겠다. 여름 초입, 낮 동안 기운이 쭉쭉 빠진 탓에 온몸이 축축 늘어진다. 바람이 선선히 불어오는 정자에 누워 낮잠이나 한숨 자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런데 언덕배기를 다 오르니 마침 미소정微笑亭이라 이름 붙은 정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그런데 거기엔 누군가들의 이름 수십개가 빼곡히 새겨져 있다. 한걸음에 달려나온 탄하스님이 말씀하신다.

“초파일에 여기 어르신들하고‘행복등 달기’를 해서 그 수익금으로 만든 거예요. 여기, 지압하는 돌 길도 그렇고. 여기 새겨져 있는게 그분들의 이름이에요.”
의성군노인복지회관은 앞마당의 아담한 정자처럼, 한결같이 그늘을 드리우며 서 있는 나무처럼, 그 그늘 아래 놓인 벤치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든 와서 쉬어가도 좋다는 듯 그렇게 제 어깨와 무릎과 마음을 내어 놓고 있었다, 마치 탄하스님 처럼.

이곳에 복지관이 들어서며 탄하 스님이 머물 기 시작한 게 2002년의 일이니 올해로 벌써 6년째다. 스님은 이 본관에서 시작해 지금은 분관까지 개관했다.
“의성군이 18개의 면으로 돼 있어서 굉장히 넓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어르신들이 찾아오려면 차비만 만원이 넘는 거리도 있어요. 그래서 동네 예식장을 빌려 이동복지관을 열곤했었는데 얼마전에 분관을 하나 더 마련했죠.”
현재 복지관 회원은 본관, 분관 합쳐서 3천명에 달하고 하루 이용하는 노인들만도 5백여 명에 달한다. 그러니 아무리 본관이 지하층부터 지상 2층까지 마련되어 있다 해도 늘 북적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노인들은 매일 같이 이곳에 찾아와 대체 무얼 하는 걸까, 뭐 신나는 일이 있어 종일 웃다 가는 걸까 싶은데, 탄하 스님이 교육 프로그램 시간표를 보여주신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프로그램이 빽빽하다. 한글 기초반부터 컴퓨터 자격증 반까지, 한국 무용부터 사교댄스·차밍댄스·댄스스포츠 교실까지, 민요 교실에서 가요 교실까지, 서예교실, 영어교실, 일어 교실 등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다.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젊은 사람들도 귀가 솔깃해지는 프로그램들이다.
“사교댄스 교실이 제일 인기예요. 일흔이 넘은 노인들 백여 명이 함께 춤을 추는데 그 모습만 봐도 장관이죠.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중요한 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점점 몸도 씻고 꾸미고 나온다는 거예요. 하루하루 지날수록 옷도 예쁘게 입고 향수도 뿌려요. 화장품 값도 걱정하고 그래요. 그렇게 말하는 노인들의 표정이 얼마나 살아있는지 몰라요.”
그렇게 말하는 스님의 표정도 살아 있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듯이. 노인들이 겉만 꾸미는 게 아니라 속까지 예뻐지고 있다는 걸, 그래서 심장박동 소리가 훨씬 더 건강해졌다는 걸 스님은 알고 있다. 그러니 스님은 그 아름다운 변화가 신나지 않을 수 없다.

관장이 스님이라고 해서 이곳을 찾는 이들이 불자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이 약 30% 정도 되고 퇴임한 목사님들도 온다. 그리고 복지관에는 딱히 불교적인 프로그램도없고 스님이 법문을 하지도 않는다.
“내 자체가 불교인데, 내가 이렇게 법복을 입고 앉아 있는데, 강조할게 뭐 있겠어요. 그거면 됐지요.”
그러다보니 처음에 선입견을 가졌던 노인들도, 400명이 넘는 봉사자들도 지금은 오히려‘관장님’이란 말보다‘스님’이라 호명 하며 다가온다.
“다른거 다 생각할 필요 없어요. 어르신들 잘 모실 생각만하죠.”
노인의 네 가지 고통苦痛은 빈고貧苦, 고독고孤獨苦, 무위고無爲苦, 병고病苦라 했다. 탄하 스님은 노인들에게 실질적, 근본적으로 필요한 게 무얼까 생각한다. 그리고 작은 것부터 행한다. 이런저런 얘기 들어주기, 커피 내기 탁구치기에서부터 국화를 재배해서 판매하는 일까지. 그리고 찾아오는 노인들 중 현재 16명을 교육프로그램의 강사로 쓰고 있고 공공근로일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스님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노인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이다. 그것은 스님의 원력이기도 한데, 노인들의 인력을 개발해 두부나 김치 공장을 열어 시장 개발을 통해 판매망까지 구축하는 것이다. 스님이 이것을 복지관 설립 10년 안에 이룰 계획으로 잡은 것은,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잃고 쓸모 없다고 여기는 노인들에게 할일을 준다는 것은 그야말로 두번째 생을 살게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그렇게 스스로 의존 재가치를 찾아야 빈고와 무위고, 그럼으로써 고독고와 병고에서도 탈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르신들 중 몇몇 분들이 시위를 하기도 해요.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거죠. 그게 참 예뻐요. 열정이 있다는 거니까. 뒷방 늙은이로 살다 가는 게 아니라 기죽지 않고 당당했으면 좋겠어요.”

대부분이 혼자 사는 노인들이다 보니 끼니를 챙기는 일이 쉽지 않다.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 해도 혼자 먹으려면 밥 한 숟가락 넘기는 게 쉽지만은 않다. 괜스레 앞자리가 허전해 입 안이 깔깔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의성군의 노인들은 이곳에서 함께 모여 점심을 먹는다. 복지관에서 조리사와 요리사 7명이 매일 자원봉사를 해서 메뉴도 다양하고 맛깔스러운 점심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른들께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탄하스님이 하는 일 중 하나는, 초파일이 지나면 도반스님들에게 전화를 걸어 쌀을 얻는 것이다. 그렇게 한 줌 한 줌 모인 쌀로 스님은 노인들의 밥을 짓는다. 그렇게 모두가 나눠 먹는다. 마치 탁발을 나간 스님이 발우에 받은 밥 한덩이를 곁에있는 걸인의 동냥 그릇에 다시 넣어주는 것처럼. 그럼으로써 우리모두가 한솥의 밥을 먹게 되는것, 이것이 진정한 나눔이 아닐까.

복지관에 나올 수 있는 노인들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 그래서 스님은 생활보호대상자인 저소득층 어른들의 집에 찾아가 난방시설도 갖춰드리고 쓰레기더미 같은 방도 치우고 밑반찬도 가져다 드린다. 그러다가 그 반찬을 아끼고 아끼느라 썩히고 있는 노인들을 보면 한바탕 화도 내고 온다. 또 올 테니 얼른 드시라고, 그렇게 딸이 친 어머니에게 하듯이. 실큼해서는 도무지 하지 못 할 일이다.
“받는 재미도 좋지만 주는 재미도 좋거든요.”
그런데, 스님은 왜 저 깊은 산사의 선방이 아닌, 사람들 북적대는 동네에 내려와 노인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어려서 만난 법사스님이 말씀하셨어요. 어느 곳에 가서 머물든 화장실 청소부터 하라고. 남이 안하는 일부터 하란 말씀이셨죠.”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낙산사에 드나들었다. 고민 많던 고등학교시절에 만난 스님은 바닷가를 거닐며 시를 읽어주며 마음을 만져주셨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서도 절집을 드나들며 홍련암 내려가는 길과 화장실 청소를 했다.‘ 이 방은 다 네 것이다’하며 내 남없이 방을 내어주시는 스님 방을 오갔다.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다니면서도‘나는 행자다’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26살이 되던 해 출가를 했는데, 그 충격에 어머니가 몸져 누우셨다. 포항에 있는 불국사 말사로 출가해 2개월 동안 행자로 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 3개월 동안 어머니를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절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렇게 9년을 아프다가 돌아가셨다.
“나태해질 땐 어머니를 생각해요. 제 2의 스승이죠. 지금 이곳 어르신들이 제 어머니 연세쯤 돼요. 저는 지금 많은 제 부모님들을 모시고 있는 거죠. 그런데 내리 사랑이라고, 제가 그분들께 드리는것 보다 받는게 훨씬 많아요. 제가 배우는게 참 많아요.”
행자시절엔 은사스님 밑에서 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웠다. 은사스님이 고아들을 키웠기에 스님은 대여섯살 되는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아침부터 그 많은 아이들의 방을 치우고 빨래하고 밥 먹이고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기도하고 주력하며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승가대학에서는 사회복지 공부를 했다. 출가 전부터 교육학을 전공했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청소년 아동 복지, 여성 복지를 공부했다. 그러다가 99년도에 의성 모선암에 살며 13평 되는 법당에서 50명이 넘는 어린이들 법회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성에 노인복지관이 생긴다는 말에 단박에 그것을 맡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연이 되어 사랑 많고 가르침 많은 노인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동국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다니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노인복지에 대해 공부중이다.

“스님들이라고 해서 선방에만 앉아 있을 게 아니라 동네로 나와서 아무나 쉽게 하지 못하는 일도 해야지요.”
저리 아리잠직한 스님이 저 큰 살림을 어찌할까 싶은데, 노인들과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까지 모두를 아우르며 습습하게 해나가는 모습은 다부진 대장부 같다. 직원들이 지나가자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은 한없이 따뜻한데, 일하는데 있어서는 더도 덜도 없이 냉철하기 만하다. 그게 스님이 복지관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단단한 칼집속의 따뜻한 성정.
스님은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에게 편지도 받는다며 웃는다. 알콜중독자였던 노인이 이제는 되레 봉사자가 됐다며 또 웃는다.
“부처님께서, 이길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준다고 했잖아요.”
웃고 또 웃는 스님께, 뭐가 그리 좋으시냐고 여쭙는다. 그러자 우문에 돌아오는 현답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스님이 되어 이렇게 큰 집에 사니 좋고, 광우병 소 안 먹으니 좋고, 돈 없으면 안 쓰니 좋고, 루즈 안 발라도 되니 좋고, 머리 안 만져도 되니 좋고, 뭐 입을까 옷 걱정 안하니 좋고, 똑똑한 자식 못 둘까 걱정 안하니 좋고, 남편 바람 피울 걱정 안 하니 좋고…, 좋은게 너무도 많네!”

스님은 현재 의성에 있는 운남사雲嵐寺주지로 있어 복지관까지 매일 출퇴근 한다. 운남사는 산 깊은곳에 있어, 이름 그대로 소나무와 어우러지는 운해와 남기가 아름다운 곳, 아직도 땔나무를 지펴 방을 데우는 곳, 텃밭을 가꾸는 곳이다. 그러니 기름값 걱정 없고 돈 걱정 없는 곳이다. 산 깊은 곳에 혼자 사니 누군가는 유배 간듯하다지만 스님은 고요하고 화려한것이라곤 하나 없는 이곳에서 하루를 정리하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삼일수심 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 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가 되고 백년 동안 탐내어 쌓은 물건은 하루 아침 티끌이 된다)’초발심자경문에 나오는 이 말은 탄하 스님의 마음에 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다.
“그래도 부자는 되고 싶어요. 줘야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스님은 또 한번 호탕하게 웃는다. 스님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밤길, 저기 보이는 어둠이 그저 어둡지만은 않다. 그러니 두렵지도 않다. 저 어둠이 걷히면 이내 밝아진다는 것을 믿고 있으니까. 밤길을 걸으며 기도한다.

탄하스님이 정말 떵떵거리는 세계적인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