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행복의 발견 - <말테의 수기>에 기대어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이달의 이야기 - 박미영 2008년 07월 317호
나비 행복의 발견 - <말테의 수기>에 기대어
박미영/시인, 계간 낯선시 편집장


빗속에, 아침에 한 여자가 울고 있다. 밤새 열어둔 베란다 창으로 들이치는 빗줄기, 경적, 차바퀴에 빗물 감기는 소리에 절규하는 듯 여자의 울음이 섞여 있다. 무슨 일일까. 새벽녘에 든 잠에서 설핏 깨어 생각한다. 꿈속까지 따라붙던 시계소리도 멈춰졌지만 잠시 그마저 잊어버린다. 잦아드는 여자의 울음, 점점 정신이 맑아진다. 무슨 일일까.

그러나 일어나 확인해보진 않는다. 대신 비스듬히 모로 누워 손가락으로 베개를 두드린다. 14층, 저 낭하 아래가 까마득하거나 불로 데워야 할 만큼 차가울지도 모를 여자의 그 공간을 확인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어릴적 장미의 내부가 궁금해 암술을 헤집던 일은 얼마나 부질 없었던가. 노랗게 부서져 내리던 꽃 가루의 그 허망함, 다소 과장되긴 하지만 유년의 그때, 사소한 것들로 유지되는 삶의 확고함을 막연하게나마 깨달은 이후 호기심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또 부질없이 관여하여 부서뜨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음을 새삼 떠올린다.

여자는 아직도 울고 있다. ‘촤-악’회초리처럼 감기는 빗물과 바퀴 소리. 동마다 난 아스팔트에 고인 빗물 위로 쉴 새 없이 오가는 차들처럼 여자는 아직도 익명인 채로 울고 있다. 이제 짐짓 누워 그 소리를 듣기만 하는 것이 스스로도 매정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일어나서 그 여자를 내다보진 않을 테다. 방관자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려고 손가락으로 베개를 다시 두드린다. 그러나 울음이라는 그 직접적인 가까움이 그 두드림을 자꾸자꾸 빠르고 세차게 만든다.

천장에서‘툭 툭’오래된 가구 틀어지는 소리가 난다. 아, 우는 여자 때문에 귀가 듣지 못한 것이 시계소리 뿐만 아니었구나. 무언지 모르게 여자의 울음에 대해 생기려는 죄의식을 떨치듯 새로운 소리에 집중한다. 툭, 정확하게 1톤 트럭 이상의 큰 차나 과속하는 차가 지나갈 때마다 천장에서 나는 소리,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천장의 전등 쪽이거나 벽 모서리쪽에선가. 아무튼 이소리는 이사 온 첫날부터 누군가의 경야經夜라도 치르게 하려는 듯 내게 불면을 안겨주었다.

툭, 천장에서 벽을 통과하는 저 소리.
여자의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누그러진다. 누가 달래기라도 하는 걸까. 천천히 손가락으로 베개를 두드린다. 그러다가 멈칫 그 두드림을 멈춘다. 혹시 여자가 위급했던 상황은 아니었을까. 몸을 벌떡 일으킨다.
하지만 몇 천 세대가 한꺼번에 모여 사는 작은 읍만한 아파트 단지인데 다 비가 내리고 이르지만 아침이라는 사실에 다시 몸을 누인다. 그럴확률은 1퍼밀(1000분의 1)도 되지 않아. 그러나 얼마나 이런 사소한 틈을 비집고 위험한 일들은 일어나던가.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베란다로 나간다. 까마득한 점처럼 여러 사람들이 훨씬 더 작은 점 하나를 에워싸고 있다. 위로하는 많은 점들과 위로받는 하나의 점. 세세히 보이진 않지만 동그랗게 등을 구부린 한 점이 작은 점의 등을 두드리고, 또 다른 한 점은 나직나직한 소리를 내며 작은점의 팔을 잡고 있다.

예전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이유 없이 울음이 터지던 때가 있었다. 타고 가던 차창 밖으로 힘겹게 걸어가던 노인들, 바람에 날리는 검은 비닐봉지, 하물며 산책길 보도블록 위흐드러진 진홍빛 장미꽃잎들만 봐도 울음이 터졌다. 급기야 흐르는 눈물은 화사하게 빛을 머금은 길가의 나뭇가지나 그 사이로 환하게 내리던 햇살도 모두 가려 바깥 세계를 온통 마음의 계단 아래 구석방에 가두어버리고 말았다. 또 그렇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도처에서 울음을 쉽게 발견해내게 했다. 마치 꿈속처럼 헤매던 길에서 앳된 아가씨가 소리를 내어 울며 지나가고, 네온이 번쩍 빛을 발하는 유흥가의 차가운 길 위에서 앵벌이 소년이 엎드려 떨고 있었다. 그때 뒷길로 들어가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던가.

여자가 울음을 그쳤나보다. 흐르는 빗소리만 창을 두드린다. 도저히 견디지 못해 주변에 드러내버린 여자의 구석진 마음에 저 비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혹여 이중의 절망이 되지는 않을까. 어쩌면 이 서술 자체가 부질없을 만큼 하찮은 일인데‘쓴다’는 것에 과대하게 의미를 부여한 감각이 빚은 허상은 아닌가. 그런 의미대로라면 이 서술 자체가 오류의 복제일터.
그러나 그때 울고 다니며 눈물 그렁한 눈으로 본 길과 사물들이 한권의 시집을 만든 시들과 두어 권분량의 산문들을 삶의 궤적에 담아 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이 모든 것이 허구이며 무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완전히 눈을 감고 모른체할 수 없음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쓴다’라는 것으로 바깥과 단절하여 문과 창문을 닫아 걸고, 그리하여 무정하다는 말이 도처에 횡행할지라도, 자신의 내면 그 밑바닥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울 수 밖에 없음을 또 알고 있다.

울던 여자도 집으로 돌아갔는지 14층 아래의 점들이 흩어지고 없다.
비는 여전하다. 다시 돌아와 앉은 책상 모퉁이에 붙은 벚꽃이 만개한 옛집 사진을 바라다본다. 이 아파트로 이사 오기 며칠 전에 찍은 것이다. 사진을 보다가 그때도 하늘이 그렇게 맑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발견해낸다. 이른 봄에 잘랐던 향나무에서 새순이 터지고 있었던 것도, 엄나무가지가 라일락나무로 벋어가는 것도 새로 발견해낸다. 그러다가 <말테의 수기>첫 구절을 떠올린다.‘ 사물을 보는 법을 다시 익히기로 하였으니…….’

그러다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을, 나비가 되기 위해 꽃나무를 기어오르는 벌레들, 정원의 한켠 흙속에서 껍질을 찢고 있을 굼벵이들을 생각한다. 그래, 자신이 속한 한 세계를 부서뜨리지 않고 어떻게 미혹으로부터의 해방을 맞이할 수 있을까. 꽃나무를 향해 오르는 벌레와 굼벵이들의 보이지 않는, 느린 행보에서 나는 행복을 발견하다.

깨닫는다는 것, 부처가 된다는 것이 전체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라면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몇 억만 겁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꽃나무를 기어오르는 저들의 행보도 그 소망을 향한 첫 발디딤 아니겠는가. 나 또한 그러함을 죽비로 머리를 맞듯 불현듯 깨닫는다. 아, 아침에 빗속에서 울던 여자가 자신의 그 고통스러운 세계에서의 상처와 혹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또한 그녀에게 빗대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나도 오로지 그 행보를 향해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힘을 하루 빨리 지니게 되기를.□

<법보시 하셨습니다(6월)>
부산 우복자 30,000원
김희진 10,000원
삼성암 10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