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가 푸른 빛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위의 푸르른 숲과 공기에서부터 행복함을 느낀다. 하루하루 이런 충만한 행복으로 살아가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부처님 제자가 아니었다면 어느 제왕, 어떤 재벌인들 이런 좋은 곳에서 살 수 있겠는가. 내가 사는 이곳엔 독사도 많고 지네도 많다. 오래된 밤나무가 많은 곳에 지네가 유독 많다고 하는데, 처음엔 그들을 물리쳤으나 요즘엔 함께 산다.
때로, 커다란 지네 한 마리가 내 살고 있는 방으로 쑥 들어와도 그냥 내버려둔다. 그러면 그도 나에게 무심하다. 머리 깎고 들어와 강산이 몇 번 변하도록 수행도 제대로 못하고 부처님께 은혜도 갚지 못했는데 이렇게 충만한 행복감을 누리고 있으니, 죄스런 마음 금할 길 없다.
마흔셋의 늦깎이로 출가했다. 늦은 나이에 출가한 데다가 몸이 아파서 뭐, 이렇다 할 행자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출가수행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속가의 아버님(서예가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이 스님들과 친교가 두터웠던 것에 큰 덕을 보았을 것이다.
아버님은 내 은사이신 혜암스님, 그리고 늘 자애롭게 대해주셨던 일타스님, 송광사 조실이셨던 구산스님 등 큰스님들과 교유가 깊으셨다. 은사이신 혜암스님은 진주 호국사에 오시면 꼭 아버님께 오셔서 이야기도 나누고 글도 쓰시곤 했다. 아버님은 한말의 유학자이셨으나 스님들을 좋아했고 잘 어울리셨던 분이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 선생 아래서 추사체를 익혔던 아버님은 진주성의 촉석루·서장대·북장대, 해인사 구광루·해탈문 주련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기셨다. 해인사 원당암 입구 돌에 새긴 ‘달마선원達磨禪院’ 이란 글씨도 아버지가 쓰신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출가할 마음을 먹고 간 곳이 해인사 원당암이었다. 그러나 선천으로 심장이 작아서 마흔이 넘어서 출가할 때까지 병치레가 끊임 없었던 나는 그것을 핑계로 행자생활을 마치 신선놀음처럼 보내고 있었다. 당시 원당암에 여연스님이 있었다. 지금의 대선배요 큰 사형이지만, 그때는 여연스님도 아버님에게 자주 들렀기 때문에 나와는 형제처럼 지낸 사이였다. 그래서 긴장의 연속이요 일 속의 강행군이어야 할 행자생활이, 그 반대로인 귀족생활 그 자체였다.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지 않고 음악 듣고 산책하며 여유있게 지내는 나를, 하루는 원주스님이 더는 두고 보지 못하겠던지 부르는 것이었다. 절에 들어온지 일 주일 쯤 지나여서였을 것이다.
성품이 아주 칼칼했던 원주스님의 얼굴엔 ‘어디서 이런 행동을 배웠는가’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철없는 늦깎이 행자에게 원주스님이 물었다.
“여기 뭐하러 왔나?”
“중 되러 왔습니다.”
“그래? 출가를 하려면 행자생활 제대로 그렇지 않으면 집으로 가라.”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힘든 일을 하지 못했던 탓으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면 궁색한 변명이 될 것이다. 선근이 부족해서였다고 해야 옳다. 그러다가 다시 간 곳이 일타스님이 계셨던 해인사 지족암이었다. 일타스님의 상좌 돈오스님이 다시 출가를 권유했던 것이 결정적 동기였다. 일타스님을 뵙고 ‘출가하러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하셨다. 스님께선 속가에서부터 오랫동안 나를 보아오시면서 언젠가는 출가해서 절집에 돌어오리란 걸 짐작하고 계셨을 것이다.
일타스님처럼 지비로운 분은 드물 것이다. 자비의 화신으로 세상에 오신 분 같다. 공양도 짓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행자생활을 하고 있던 그해 설날이었다. 일타스님께선 당시 해인사 주지 소임을 보고 계셔서 큰절에 내려가신 데다가 설날이어서 사람도 없고 단촐하게 우리 행자 셋과 원주스님만이 있게 되었다. 설날 저녁, 입이 궁금하다는 것을 빌미로 내가 선동해서 네 사람이 곡주를 마시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괜찮았는데 몸이 약한 내가 일타스님의 차실 카펫에 음식물을 토해놓고 말았다. 날도 춥고 물도 없고 해서 대충 치웠는데 다음날 아침, 일타스님께서 큰절에서 올라오셨다가 차실 문을 여셨다. 스님께선 그 역겨운 냄새를 맡고 상황을 짐작하셨을 텐데도 한번 휙 둘러보시고는 아무 말씀 없이 큰절로 내려가시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런 분이셨다. 나는 스님께서 어느 누구에게도 성을 내시거나 큰소리를 내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상좌들이 어디 출타한다고 하면 꼭 지갑을 열어 차비를 주시곤 하던 모습이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계를 받고 십년 쯤 뒤, 선방에 다니다가 장경각에서 천일기도를 하려고 일타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스님께서 그러셨다.
“너는, 이제부터 중 생활 시작이다!”
늘 자비로움으로 지켜봐주셨던 스님의 그때 그 말씀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가. 잊을 수 없는 분이다. 3개월 정도 지족암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허리가 아파서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있는 내게 ‘계를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주신 분도 일타스님이셨다. 아마 스님의 자비로움이 아니었다면 내 출가의 길은 거기에서 멈추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연락을 받고 계를 받으러 간 곳은 지족암이 아닌 원당암이었으니, 사제의 인연은 따로 있나보다. 혜암스님께선 내게 법운法雲이런 법명을 주셨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가의 이름인 ‘일화一和’로 바꾸었다. 스님께서 아시곤 잠깐 언짢은 기색이셨으나 별 말씀 하지 않으셔서 이제껏 쓰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건방지고 어이없는 일이다.
은사스님은 성품이 대쪽처럼 곧고 칼칼하신 데다가 부지런하기 이를 데 없으신 분이었다. 출가하기 전에 원당암에 들렀다가 벌을 키우고 계신 스님께 철없이 물은 적이 있다.
“스님! 이걸 왜 키우고 계십니까?”
“그런 소리 마라. 벌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아나? 나는 벌을 보면서 부지런함을 배운다.”
스님 회하에서 생활했던 사형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좌들을 얼마나 닦아 세우는지 잠시 쉴 틈을 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부지런하셔서 한 순간도 손을 놓고 앉아계시질 않던 분이었다.
어영부영 행자시절을 보내고 빈틈 없이 행자생활을 잘 보낸 해인사 젊은 도반들 틈에 끼여서 미안하고 서먹서먹한 채로 범어사에서 수계를 하고 출가의 길에 들어선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예순다섯이 되었다.
이제야 철이 드는 것 같다. 부처님 덕에 머리 깎고 먹물 옷 입고 스물 몇 해를 살았으나 수행자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왜 처절하게 수행을 하지 못했나 하는 회한이 밀물처럼 밀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위로하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가장 좋은 때가 아닌가.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출가수행자가 된 것에 부끄럼과 후회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산다.
한평생 병고와 함께 하며 늘 죽음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스승처럼 참 수좌의 길을 걷고자 계를 받고 강원에도 가지 않고 7년 동안 선방에 다니다가 수좌의 길을 접게 한 것도 병고였다. 그러나 이젠 그 끈질긴 병고가 진정 부처님의 좋은 채찍질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젠 몸이 건강해지길 발원하기보다는 병고로써 부처님 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발원하고 있다.
지금까지 게으르게 살아왔던 것을 참회하면서, 이산선사 발원문처럼 세세생생 수행자로서 한치도 부처님 법에서 떨어짐 없이 살 수 있기를 발원하고 또 발원한다.
취재· 글/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