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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철벽을 뚫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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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철산 2008년 05월 315호
은산철벽을 뚫어라
철산/내소사 선원장


절(내소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의 견해를 두지 않았다.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해서, 스승이신 해안 선사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라는 대로만 했더니, 어지간히 답답하셨던 모양이다‘. 스물 다섯살이나 된 놈이, 그것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온 놈이 세상천지를 그렇게 모르느냐?’하시면서 야단을 치셨다. 청소하는 것, 방문을 열고 나가는 것, 상을 들고 들어오는 것까지 온통 지적받는 일뿐이었다. 잠을 잘 때도 꾸지람 소리가 귀에 쟁쟁해 돌아가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던 어느 날, 우연히 스승께서 사형 인혜산스님에게 하시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저 아이 때문에 갑갑해서 힘들다.”
그날 오후 내내, 내소사 지장암 바위 밑에 앉아 앞날을 깊이 고민했다. 상상도 하지 못 할 깊고도 넓은 지혜가 불교에 들어 있다는 신념으로 들어온 출가의 길에서, 이런 꾸지람으로 돌아가서야 되겠는가를 고민했다. 꾸짖음 당한 하나하나를 헤아려보면서 자문자답하다가 보니 저녁 어스름이 되었던 것 같다. 혜산 스님이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철산! 철산!”
못 들은 척하고 떡갈나무 뒤로 숨었다. 사형은 떡갈나무 앞을 지나 숲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적부터 친구들과 동떨어져 사색하기를 즐겨했고, 부단히, 뚜렷한 삶에 대한 목표를 찾고 있던 내게 불교와의 만남은 개안 그것이었다. 군대에 다녀와 직장생활을 할 때, 함께 하숙하던 분(김용복 씨)의 인도로 대학생불교연합회에서 마련한 이종익 교수의 불교 강의를 들었다. 첫날, 12연기법을 듣고는 그만 불교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수원 봉녕사 근처에서 태어난 내게 불교는 가끔씩 마을에 들러 염불하며 탁발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전부였다. 그런데 탄허 스님, 청담 스님 등 선지식들께서 토해내는 법문은 머리에 삭삭 박혀들어왔고, 법문 듣는 일이 일상의 가장 기쁜 일이 되어갔다. 어디서 법문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회사에 조퇴까지하고 달려갔다.
그렇게 법문을 듣고 다니던 어느 날, ‘전라도의 숨은 도인인 해안 스님이 오셔서 금강경 법문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 주를 마치 소풍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드디어 법회가 열리던 날, 맨 앞줄에 앉아 법문을 듣고 처음 해본 금강경 독송이 얼마나 횐희심 나고 좋던지 집에 와서 홀로 독송해보기도 했다. 아무튼 그날 들은 물질세계의 덧없음을 설파한 금강경 사구게는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해안 스님이 주도하는 일주일 용맹정진 법회에 참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직장엔‘장가들기 위해 지방으로 선보러 간다’고 얘기해 놓고 간신히 휴가를 내서 법회에 참석했다. 인원은 오십여 명쯤 되었는데 남자라곤 나 혼자뿐이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법문은 없고 관음주력만 하는 게 아닌가. 앉아 있자니 다리는 쑤시고 아픈데‘아니, 관세음보살 다섯 글자를 몰라서 밤낮 앉아서 이걸 부른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수시로 올라왔다. 회사까지 결근하고 들어 왔는데 정말이지 답답한 노릇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스님께 인사나 드리고 가려고 방문을 여는 순간 나의 운명이 정해졌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곳에 홀로 앉아 있는 스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었다. 흰 무명옷을 입은 스님의 모습은 한 마리의 고고한 학 그것이었다. 스님의 모습에 압도당한 나는 용건을 이야기했다.
“일주일 동안 법문을 한다고 해서 왔는데 법문은 없고 관음주력만 하니 흥미가 없습니다. 오랜 결근으로 회사에 지장을 주고 있으니 돌아가서 일당이라도 벌어야겠습니다.”
“일당이 얼마인고?”
월급을 계산해서 말씀드리자 스님께서 그러셨다.
“흠, 얼마 안 되는구나. 가려면 가라. 그러나 사내 대장부가 한 번 뜻을 세웠으면 끝까지 마무리를 짓고 가야지 중도에 가려고 한단 말이냐? 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그러나 도를 깨닫는 이 공부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보물이다. 사흘 동안은 관음주력을 하고 내일부터는 참선을 할 것이다. 주력을 하는 것은 자신이 알게 모르게 지어온 업을 녹이는 것이니 밤을 새워서라도 그간 못다한 주력을 해라. 내일 화두드는 법을 일러주마.”

훗날 알았다. 사흘 동안 힘을 다해 주력을 마치고 나면 마치 무거운 짐을 놓은 듯 홀가분해서 입선하면 화두가 딱 들어온다는 것을. 번뇌망상이 사라지니까 맑고 깨끗하고 고요해져서 화두들 기에 좋은 것이다.
그 시간 이후 남은 시간 동안 그야말로 나는 피나는 정진을 했다. 스님의 지도방법은 강도가 높았다. 한 순간도 방심하지 못하도록 일일이 한 사람씩 불러들여 화두를 점검하셨다. 때론 경책하고 때론 격려하시면서 화두 하나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잘하고 있구나. 정신 잘 차려서 계속 잘해라. 너는 지금 도를 깨닫기 직전에 와 있다. 비유를 들면 방에 들어 가는데 문고리를 잡고 있는 것과 같다. 열어제끼기만 하면 들어가는 것이다.”
엿새째 되는 날 스님에게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쁜지,‘ 도를 깨달으면 모르는 것 없이 다 훤히 다 안다고 하니 친구들, 선배들, 동료들 모두에게 도를 알려주고 제도하리라’생각했다. 돌아보면 때 한 점 없이 참으로 맑고 순진한 때였다. 남은 나흘 동안 얼마나 열심히 정진했는지 직장으로 돌아갔을 때, 달덩이 같던 스물네 살의 내 얼굴은 바짝 말라 있었고, 회사동료들은 놀려 댔다.

일주일 용맹정진에 다녀오고 나서 한 해 후 출가했다.
출가를 결심하고‘지혜를 성취해서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나 절에 들어와 일주일 후, 중국의 양개 스님이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읽고는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절대 돌아가지 않겠습니다’라고. 오륙 년 후, 그 비정한 아들이 다 떨어져 솜솜 툭툭 삐져나온 스승의 누비 두루마기를 입고 고향집에 나타나자 아연실색하셨다. 내 딴에는 스승의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간 것인데, 어머닌 돌아서 나오는 아들에게 다가와‘스님, 그렇게 옷이 없어요?’하시더니, 얼마 후 모직으로 해서 만든 옷을 부치셨다. 그런데 옷이 작아 입지 못했다.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고 다음부터는 깨끗한 옷을 입고 고향에 갔으니, 그렇게 비정한 아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밤이 점점 깊어지자 플래시를 들고 혜산 사형이 다시 내 이름을 부르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밤 열시쯤,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결론을 내렸다.‘ 나를 위해서 꾸중을 내리시는 것이지 일부러 그러시겠는가. 마음 문을 열어놓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 무슨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말자.’
그 이후론 아무리 야단을 쳐도 얼굴 표정 하나 없자 스님께서 신도분들에게‘철산은 인욕보살이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한참이 지나도록 나 스스로 잘 참고 견딘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스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달았다. 어느 날 혜산사형께서 초등학교 4학년인 어린 행자를 데리고 와서 스님께 인사를 시켰다. 그러자 스님께서‘어려서부터 가르 치려면 힘이 벅차 이젠 못하겠으니, 자네가 하소’하시는 것이 아닌가. 미욱한 나는, 3년이 지난 그때서야‘지금까지 나에게 내리신 꾸짖음은 잔소리가 아니라 일부러 나를 단련시키려고 일부러 하신 거로구나’를 깨달은 것이다.
그날 그 자리에서 비로소 눈물나도록 뼈저린 감사함을 느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감사함과 은혜를 잊을 수 없다. 출가해서 돌아가시기까지 3년 동안, 스승과 함께 겸상을 하고 한방에서 잠을 자면서 보고 배운 것이 없었다면, 스승께서 혼신의 힘으로 나에게 내려준 그 고구정녕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이리 출가의 길을 벗어나지 않고 어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은사스님은 나에게‘철산鐵山’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좌우로는 강, 뒤로는 맹수, 앞으론 은산철벽銀山鐵壁이다. 살 길은 은산철벽을 뚫는 길밖에 없다. 목숨 뚝, 떼어 놓고 올라가라. 깜깜하다고 놓아 버리면 안된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모기가 철벽을 뚫듯 간단없이 공부해서 은산철벽을 뚫으라고 하신 스승의 말씀 앞에 깊은 참회의 합장을 올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