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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호국팔만대장경법회(정대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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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공감 - 해인 편집실 2008년 05월 315호
정대불사 2008 호국팔만대장경법회(정대불사)

우리의 선조들은 \'법\'을 세워 나라를 구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만들었지요. 그리고 \'법\'을 지켜애 했습니다.
오래도록...
정대불사의 시작입니다.

2008 호국팔만대장경(정대불사)가 4월 12일 법보종찰 해인사에서 있었습니다. 5,000명이 넘는 사부대중이 모여 선조들의 모습을 다랐지요. 장엄한 모습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 빛은 어땠을까요? 부처님의 법을 구하고 영원히 따르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정대불사를 시작한 선조들의 마음결을 따라 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조들의 뜻이 담긴 전 조계종포교원장 도영 스님의 법어 중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가야산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인도의 붓다가야에서 기원합니다. 붓다가야에서 성도하신 후 부처님은 평생에 걸쳐 진리의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초기에는 진리의 말씀이 암송으로 구전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고 진리의 말씀을 널리 전하기 위해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도에서는 패다라수잎을 주로 사용하였고, 중국에서는 목판이나 석판을 이용하여 대장경판을 조성하였습니다. 고려 때에는 보존과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대장경을 나무에 새겼습니다. 대장경판을 한 장 한 장 인경하여 책을 만들고 보니 누구나 대장경을 쉽게 열람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 법이 이 세상에 오래 오래 머물기를 발원한 정법구주正法久住의 정신이 목판대장경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판 대장경입니다. 대장경을 조성할 때 거란족의 침입과 몽고족의 침입으로 국토는 황폐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고려인들은 정법이 쇠미해진 까닭에 이러한 국난을 당하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국왕을 비롯한 모든 관료와 귀족 등 모든 백성들이 이러한 믿음에 한 점 의혹이 없었습니다. 그 응집된 마음은 팔만대장경 결집으로 나타났고 외적은 물러갔습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조성으로 고려인은 대통합을 이루었고 그 힘으로 국가적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함경 우바새경에‘만일 사람들이 함께 모여 화합하여 일을 함께 한다면 그 나라는 반드시 흥하고 쇠하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대국민 통합으로 대장경 조성을 이루어냈고, 대장경판이 국가를 보호하게 되었다는 믿음의 호국신앙이 모든 백성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대장경판을 조성하는 신앙이 경판을 수호하는 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대장경판은 강화도와 남해 등 전국 각지에서 조성하여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즉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인 가야산으로 대장경판 하나하나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수레에 실어 옮긴 것입니다. 이 운행렬에 참여한 불자들은 대장경판을 정대한다는 경건한 신앙심으로 임했고, 걸음걸음마다 대장경판이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러주기를 간절히 발원하였습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나라가 태평하고, 정법이 이 땅에 오래 머물기를 발원하였습니다.

대장경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햇볕 좋고 바람이 알맞은 봄날에 거풍擧風을 해야 합니다. 장경각에 봉안된 경판 하나하나를 머리에 이고 나와 거풍을 하는 것입니다. 목판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해인사로 이운한 것처럼 경판을 양지바른 마당으로 내모신 것입니다. 이것이 정대불사였습니다. 해인사에서는 700여 년 동안 해마다 봄이면 이 일을 반복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8년 전 영암 큰스님은 해인사 대중들이 해오던 정대불사를 전국의 불자와 국민이 참여하는 정대불사로 확대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책을 정대하였던 것에서 나중에는 목판을 정대하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을 돌고 대웅전을 돌고 장경각을 도는 이운 행렬은 과거에 해인사로 대장경을 이운하던 행렬 그대로였습니다.□
<2008 호국팔만대장경법회도영스님법어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