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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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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문재 2008년 05월 315호
화석 연료의 고갈과 국제 곡물가 상승은 분명 위기다. 그러나 석유가 고갈되고 식량이 무기로 둔갑하기 때문에 위기인 것만은 아니다. 에너지와 식량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진짜 위기다. 안타까움이나 절망을 넘어, 공포스럽다.


봄날은 간다
이문재


지난 해 타계하신 권정생 선생이 남긴 두 권의 산문집 가운데 하나가 <우리들의 하느님>이다. 삶이 헐거워질 때,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느슨해질 때 펼쳐들곤 하는데, 그때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선생은 평생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오두막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서울에는 딱 한번 다녀갔고, 대구에 몇 번 출타했을 뿐이다. 안동의 시골에 틀어박혀 계셨지만,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는 훤했고, 훤했기 때문에 늘 아파했다. 종교의 타락, 농촌 붕괴, 분단 상황에 대한 선생의 분석과 대책은 놀랍다. 인간과 사회, 문명과 지구를 바라보는 눈이 예리하고 정확하고 깊고 넓다.
선생의 산문 중에‘만일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 똥짐을 지실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처음 저 대목을 접하고 한동안 먹먹했다.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발표한 졸시‘농업박물관소식-우리밀어린싹’은 저 한 줄로 시작해 다음과 같이 끝난다.

농업박물관 앞뜰
나는 쪼그리고 앉아 우리밀 어린 싹을
하염 없이 바라다 보았다
농업박물관에 전시된 우리밀
우리밀, 내가 지나온 시절
똥짐지던 그 시절이
미래가 되고 말았다
우리밀, 아 오래된 미래

나는 울었다

예수가 지고 올 똥짐은 물론 상징이다. 나는 예수의 똥짐을 우리가 지금까지 버렸고, 지금도 버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버릴 모든 것이라고 이해한다. 우리가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룩한 근대는 산업의 근대였으니, 산업적 근대화는 대량으로 생산하고, 대량으로 소비한 다음, 대량으로 폐기하는 일방향 시스템이었다. 저 대량의 생산-소비--폐기 시스템은 광범위하고 지속적이었으며, 가속도가 붙는 가공할 시스템이었다. 우리가 버린 것은 그러나 사라지지 않았다. 일부 쓰레기는 태워졌지만, 태운다고 해서 쓰레기의 성분이 지구 밖 우주로 날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쓰레기는 매립되거나 수장되었다.

우리는 원환의 질서에서 이탈했다. 입으로 들어온 음식이 항문으로 나가면서 우리는 순환의 질서에 참여해왔는데, 산업 기술 문명을 받아들인 이래, 우리의 몸은 저 순환의 질서를 끊어내는 몸으로 바뀌었다. 똥이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몸 밖으로 밀어내는 배설물은 하수관을 통해 곧장 바다로 간다. 자기 똥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똥이 논밭으로 돌아가 채소와 과일, 곡식을 키우지 않으면 땅이 죽는다는 오랜 지혜이자 가르침이다. 똥으로 키우지 않은 먹을거리는 몸을 죽인다는 경고다. 매일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 먹을거리에는 똥이 없다. 비료와 농약, 중금속, 방부제, 항생제, 성장촉진제, 인공색소 따위‘제품(상품)’이 들어 있다. 모든 먹을거리는 이제 땅이 키운다기보다는 기계가 키운다.
기계가 키운다는 것은 석유를 비롯한 화석 연료가 키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똥 / 땅을 먹는 것이 아니라 화공약품/석유를 먹는 것이다. 재림 예수가 똥짐을 지실 것이란 권정생선생의 비유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문명사적 전환을 이루지 않으면 인간이 자멸하고 말것이란 끔찍한, 아니 너무나 당연한 예언을‘예수의 똥짐’에 비유한 것이다.

에너지와 식량 대란이다. 원유는 배럴 당 백 달러를 넘은 지 오래고, 밀과 옥수수와 콩에 이어 쌀값까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전문가와 언론은 연일 에너지와 식량 대책을 쏟아 붓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근본 처방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고유가 시대를 이겨내는 슬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인터넷에 각 주유소의 기름값을 공개하면서 소비자들로 하여금 가격이 싼 곳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이 인터넷 사이트는 방문자가 폭주해 첫날 다운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대책은‘기름’이 아니라‘기름값’대책이다. 태양열이나 풍력 발전과 같은, 화석 연료 의존도를 낮추는 방안은 공론화하지 않고 있다. 식량 대책도 마찬가지다. 쌀을 제외하면 우리의 식량 자급률은 채 5%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세계 3위의 식량 수입국이다. 값싼 수입 선線을 마련하고, 동남아나 만주 지역에 식량 생산 기지를 마련하자는 것이 식량 대책의 전부다. 아무도 농업을 살리자고 말하지 않는다. 화석 연료의 고갈과 국제 곡물가 상승은 분명 위기다. 그러나 석유가 고갈되고 식량이 무기로 둔갑하기 때문에 위기인 것만은 아니다. 에너지와 식량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진짜 위기다. 안타까움이나 절망을 넘어, 공포스럽다.

봄날이 간다. 맹렬하게 푸르러지는 산과 들을 바라보다가 엉뚱한 상상을 한다. 스님들이 농사짓는 모습 말이다. 스님들이 농업을 살리자며 논으로 들어가신다, 스님들이 생명을 살리자며 비료 대신 퇴비를 만든다, 스님들이 지구를 보전하자며 귀농 운동을 펼친다……,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