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의 달빛이 무색하도록 아침부터 부슬부슬 봄비가 내린다. 봄비가 보태면 얼마나 더 보탤까. 봄비 사이로 아침 새소리가 묻어오는 것을 보니 이 비가 봄볕보다 더 얌전하지 싶다. 저 산에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눈에 띄게 그 광경이 달라지리라. 봄비 내린 산길에 오늘은 나도벗 하나 유혹하여 그를 앞세우고, 냇가를 건너며 땅을 구르고 봄맞이 노래나 한 자락 불러보련다
이 봄, 찻잔 속의 달을 마시다
자, 이제 밤이 깊었으니 곧 봄날 보름 둥근 달은 분명 동쪽 동산 마루를 차근차근 밟고 올라올 시간이다.
거처하는 누옥陋屋을 마주하고 동쪽으로 누운 산이 월출시간의 발목을 잡는 터라 훤한 달빛을 창 안에 들이려면 보름날이라도 제법 밤이 깊다. 바야흐로 달이 떠올라 이제 막 피운 꽃잎에 그 빛이 부서질 때 즈음이면 나도 엊저녁 소식蘇軾의 시구에서 읽은 듯이 옷자락을 걷고 달 아래 거닐며 꽃 그림자를 밟고 싶어 뜰 앞에 나섰다. 이미 바닥은 흐르는 달빛에 말갛게 씻기었고, 잔잔한 봄바람이 댓잎을 흔들며 바닥을 훑어 놓았다.
꽃 사이에 자리 펴니 밝은 향기 피어나고,
화간치주청향발 花間置酒淸香發
다투어 긴가지 끌어 당기니 향기로운 꽃잎 눈처럼 떨어진다.
쟁만장조락향설 爭挽長條落香雪
이곳의 묽은 술은 마실만한 것은 못 되나,
산성박주불감음 山城薄酒不堪飮
그대, 잔속의 달이라도 마시게나.
권군차흡배중월 勸君且吸盃中月
-소식蘇軾<달밤에 손님과 살구꽃 아래 술 마시며(월야여객음주행화하 月夜 與客 飮酒杏花下)>
그 봄 소동파는객과 달을 함께 맞이 하였으나, 이 봄나는 하얀 목련꽃 아래 달빛을 벗하고 술잔대신 차를 다려 찻잔을 채울 것이다. 잔 속에 달을 담고 차를 마시면 차향이 달빛보다 더 고소하고 은은하지 않을까 하며 기다리는 마음에 생각조차 흐뭇하다. 이렇게 밤은 깊고 꽃향기는 은은하여 방으로 돌아갈 것도 잊고 있으니 봄을 즐기는 데에 밤낮이 따로 없음을 알았다.
봄바람은 그것을 기다리는 관객들의 앉은 자리 아래로 불어오는지 따듯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나는 올해 만큼은 상춘賞春을 작정한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마음이 된다. 마치 대지 속에 몸을 의탁하여 봄을 기다려왔던 씨앗들처럼 역시 문을 박차고 나와 밤이나 낮이나 봄이 온다고 하던 길목으로 달려가 그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봄이 내 뜰 안에 정확히 안착했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그가 얼마나 마음이 쉽게 변하여 가버릴지 알아채고는 흐르는 달빛에도 꽃잎이 떨어질까 마음은 그냥 제풀에 지쳐 버렸다. 그래서 아마 간밤에도 잠자리가 편치 않았나 보다.
내친 김에 만해萬海(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스님의<춘주春晝>라는 선시를 읽어 보았다.
따스한 볕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피고 앉았더니
삽살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 친다
어디서 꾸꿍이 소리산을 넘어 오더라.
만해 스님께서 처음에 붙였던 제목이 <공화난타空華亂墜>란다. 좀 어렵지 싶다. 내 부족한 소견으로도‘허공에 흩어지는 꽃(공화空華)’보다는‘봄날(춘주春晝)’이 더 낫다. 꽃잎이 유마경 구절을 가렸다 하지만 그것을 흩어지면 그뿐인 꽃잎으로 허무하게만 볼 일이겠는가. 시 중의 봄볕은 따스하고 꽃잎은 바람에 난분분,
거미는 열심히 제 집을 짓고 삽사리도 제 본분에 열중하는데, 선사는 오가는 봄날 한가함에도 그저 무심하실 따름이 아닌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봄이 올까 안달하고 그것이 갈까 또 조바심내며 종종 거리며 호들갑 스러운 나 같은 오합지졸은 봄볕을 그대로 즐기는 만해 스님의 의젓함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하지만 봄을 당하여 만해 스님과 같은 의연함이 어디쉬운 일인가. 그림책을 넘기다 나같이 호들갑스러운 상춘賞春객들을 만나고 나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남송南宋의 화가 마원馬遠(12세기 후반~13세기 전반기 활동)이 그린 <답가도踏歌圖>라는 그림이다. 남송의 수도였던 임안臨安(현재 항주杭州)은 상해보다 더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보다 봄이 덜 극적이기는 하겠으나 운하와 호수가 많은 지역이라 겨울은 으스스하여 뼛속까지 떨리곤 한다. 그러니 따스한 봄볕에 수양버들 물이 오르고 냇물이 풀리는 그 봄을 어찌 아니 즐거워하겠는가. 땅을 구르고 박수를 치며 즐거워할 일이 틀림없다. 화면 속 수양버들은 한껏 물이 올라 있고 시냇물은 작은 다리 아래로 봄물이 풍성하다. 이미 한 사람은 다리를 건너며 박장대소인데 그 뒷춤을 다른 이가 잡아 끌며 장난질이다. 앞선 세 사람은 관모를 쓴 이들이지만, 그 뒤를 따르는 하인은 즐겁지만은않은 듯한 표정인데, 장대 걸려 있는 표주박은필경 답가행의 흥을 돋우게 될 술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안주를 갖추고 있지 않은데 그 장대는 낚싯대로 쓸 것이 틀림없다. 이제야 하인의 표정이 이해가 간다. 따뜻해진 봄기운은 산 골짜기마다 구름을 토해놓고 그 구름 사이사이에 이들의 봄 노래가 묻어날 일이다. 마원은 산중으로 달려간 봄맞이를 그렸고, 나는 그들의 봄맞이에 자극을 받아 내일은 필시 저 앞산으로 뛰어가겠지 싶다.
간밤의 달빛이 무색하도록 아침부터 부슬부슬 봄비가 내린다. 봄비가 보태면 얼마나 더 보탤까. 봄비 사이로 아침 새소리가 묻어오는 것을 보니 이 비가 봄볕보다 더 얌전하지 싶다. 저 산에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눈에 띄게 그 광경이 달라지리라. 봄비 내린 산길에 오늘은 나도벗 하나 유혹하여 그를 앞세우고, 냇가를 건너며 땅을 구르고 봄맞이 노래나 한 자락 불러 보련다.□
김현정님은 상명대학교에서 한국미술사를 공부하였으며, 석가여래설법도상 연구로 동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한국 전통문화학교 강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