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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원효센터 공파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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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천미희 2008년 04월 314호
호계삼소-부산 원효센터 공파 스님 부산 원효센터 공파 스님

“그대는 진정 부처님 말씀을 믿는가?”

불자라고 자부하며 절에 와 있는 사람을 향해 당연해 보이는 질문을 던지는 스님이 있다. 당연하지만 당혹스런 그 물음은 심기를 건드린다. 혹자는 그런 스님을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절에 와서 마음 편하게 고민거리나 털어놓고 갈 양이었거나, 평생 절에 다녀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부처님 말씀을 믿어왔다고 큰소리치며 살아왔던 사람일수록 이처럼 당연한 질문으로 심기를 건드리는 스님이 편할리 없다.

“그대는 진정 불법을 믿는가?”

생뚱스런 질문 같지만 정말로 불법을 믿는자는 그리 많지 않다. 바라밀에 이어 간경 참선 같은 수행은 불법을 확실히 믿기 위한 터전을 닦는 것이다. 선근이 얕은 중생은 부처님 말씀을 믿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에 언제나 바쁘게 사찰을 오르내리며 헉헉거리기 바쁘다. 우선 다급하여 믿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사그라지고 마는 그런 신심이기에 원효 스님은 그런 범부의 신심을 바람 앞에 놓인 털올과 같다고 꼬집으셨다.


불교는 태양과 공기처럼, 선택 아닌 삶의 필수.

믿음이 없으면 늘 불교의 언저리를 돌게 된다. 언저리는 위험하다. 낙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심부로 들어와야 한다. 세상은 정신 없이 돌아가고 있다. 중심부에 들어오지 않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태풍의 중심이 안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믿음이 없으면 늘 관망하고 서성인다. 정확히 요즈음 불교도가 이렇다. 그들은 불교 신자라고 하지마는 불교를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심어주려고 특별히《대승기신론 해동소》를 선택하여 불철주야 이것만을 집중연구 강의하시는 스님이 있다. 바로 부산에 있는 원효센터의 공파스님이다.

왜 지금《대승기신론 해동소》인가? 스님은 답한다.
“ 스스로 믿고 있는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확신을 일으키는 론이 바로 대승기신론입니다. 믿음에 대한 확신이 서버리면 불법은 저절로 3~4배로 확장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지금의 불자들에게 있어 불교는‘레저’와 같아서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인 선택 사항처럼 여기죠. 그래서 엄마가 절에 다니며 불법을 믿는다고 해도 가족들은‘절에 가는가보다’할
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심이 일어나면 스스로 바뀌게 되고 그 한사람으로 인해 모든가 족에게 변화가 일어나며 친족, 이웃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불법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입으로는 믿는다 하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스님의 분석이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일까? 스님은 배당이 확실한 투자라면 자신의 전 재산을 베팅할 것이라는 경제 개념으로 간단히 설명해 보인다. 부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다면 불법에 전 생애를 걸어야 하는데 인생 전체를 베팅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 스님의 지적이다.“ 불교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람들조차 불법을 안 믿는데 어떻게 포교가 되며 어떻게 불법이 일반 사람들 속에 살아 숨쉴 것이며 법의 바퀴가 구르겠는가?”스님은 차갑게 되 묻는다.
불교신자가 점점 줄고 행자부족시대를 겪게 될 것을 우려하는 포교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이미 스님의 말씀 가운데서 나왔다. 불법이 일반인 속에 살아 숨쉬게 하고 법륜이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부처님 말씀을 백 퍼센트 믿고 인생 전체를 불법에 투자하는, 삶의 방향 전환이 된 진정한 신자信者가 곳곳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지금 다시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마명 보살이 지은《대승기신론》을 우리의 가슴에 생동하게 해야 하는 이유이며, 중국에서조차 기신론 연구의 기본 문헌으로 삼을 정도로 칭송 받았던 원효스님의 해동소를 펼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이다.

“원효 스님은 대승을 일심一心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일심을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일심은 불교에만 국한된 도그마가 아닙니다. 사람을 개혁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며 사람을 미몽에서 밝음으로 탈바꿈 시키는 가르침입니다. 불교를 단순히 하나의 종교로 봐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필수적인 공기처럼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 하며 어둠에서 밝음을 향해 나아가는 등불이 바로 불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태양은 종교가 아니지만 모두 태양을 쓰듯이 일심은 스님이나 불자들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며 피해야 할 것은 외부 경계나 물질이 아니라 내 마음임을 일깨우는 대승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이 설 때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모든 갈등, 불안을 넘어 진정한 화합과 조화로 나아 갈 수가 있습니다.
내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불안, 시비, 분별은 두말 할 것도 없겠지요.”
그래서 스님은 원효 스님을 신라 시대를 살다 간 역사 속 인물이 아니라 현대인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쉬는 스승으로 만들고 싶다. 원효 스님을 과거의 신화적 인물로 두지 않고 해동소를 통해 펄펄 살아서 나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인물로 되살려 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대승기신론 해동소 별기 강의만을 고집하는 이유다.

원효센터에는 각종 기도나 법회 대신 대승기신론 해동소 강의가 일주일 내내 열리고 있다. 현재 4, 5, 6, 7기 강의가 진행 중이며 한 기수가 끝나면 수시로 다음 수강생을 모집해 해동소의 가르침이 끊이지 않는 도량이 되고 있다. 4기가 6권 말미에 가 있어‘부처님오신날’을 기해 8기 수강생 모집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처럼 대승기신론 해동소 별기만을 심층 연구하고 강의하는 곳이지만 강의가 단순히 학문을 배우는 것으로 치우치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한다. 학문을 위해 대승기신론을 배운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단언한다. 대승기신론을배워 졸업했다는 교만을 경계하기 위해 마지막 한 줄을 가르치지 않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진정 대승기신론을 배워 마치는 것은 그의 삶이 바뀌고 신행으로 이어질 때에야 완성되는 것이다. 즉, 정확히 배우고 나면 신심이 일어나 신행으로 절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원효센터에서 대승기신론을 배운 이들이 장엄염불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부처의 세계로 장엄하는 신행을 이어가는것도 이런 까닭이다.


가장 수준 높은 대승기신론 해동소 강의하는 곳, 원효센터.

스님은 원효센터가 대승기신론 해동소를 전국에서 가장 수준 높게 강의하는 곳이라고 자부한다. 이른바 ‘명품 강의’론을 펼치며 월 10만원의 강의료를 고집한다. 명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 값을 지불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공파스님의 강의를 듣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그 돈은 결코 비싼것이 아니다.
지금도 부산은 물론 서울, 김해, 양산 등지에서 스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들고 있는 수강생들은‘불교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주는 스님의 강의는 백만 불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입을 모은다. 강원에서 이미 대승기신론을 배웠던 스님들 조차‘대승기신론이 이토록 논리적이고 아름다웠구나’하고 감탄을 연발하며 스님의 강의에 빠져 든다.

대승기신론은 기가 막히게 논리적인 구조로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를 펼쳐 보이며 어떻게 부처가 중생으로 전락했는지 또 어떻게 하면 부처의 세계로 환원해 돌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대승기신론에는 부처님의 핵심 사상, 즉 팔만대장경의 핵심이 정리돼 있으며,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주며 대승불교의 올바른 믿음을 일으켜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며, 부처의 종맥이 이 땅에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대승기신론을 쓴 이유에서 알 수 있듯 불교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고자 하거나 스스로 불자라고 하면서도 불교가 무엇인지, 또 부처로 환원하는 방향을 모르겠다면 대승기신론을 놓쳐서는 안 된다. 보물 지도를 손에 쥐고도 읽기 어렵다고 포기한다면, 보물이 숨겨진 곳에는 영원히 도달 할 수 없으며 결국 그보물은 내것이 될 수 없다.

“믿음이 없는 불교신자들이 변두리를 돌면서 금덩어리를 두고 동전을 주우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심 세계의 믿음을 심어주려고 나는 대승기신론 해동소 전파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스님은 정말로 이 분야에서 만큼은 가히 독보적이며 해박한 안목을 지녔다고 정평이 나 있다.
대승기신론은 어느 종파만이 가지는 교과목이 아니다. 그것은 대승불교를 일으킨 마명 보살의 저술이기에 그렇다. 거기다가 통불교를 주창한 원효 스님이 풀이를 하셨기에 조금도 편협되거나 국집된 편론의 시각이 없다. 이런 논서는 일찍이 대소승 권역을 가리지 않고 부처님의 족적을 따라 각국의 불교를 오랫동안 수학했던 공파 스님의 내공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강의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아름다운 풀이와 기가 막히는 비유, 때론 시대를 예리하게 꼬집는 익살스런 풍자가 물씬물씬 나는 강의는 국제승려만이 갖추고 있는 다각적이면서 넓은 시각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나는 오로지 대승기신론의 전령사입니다. 마명 보살은 원효 스님께 감사해야 하고 원효 스님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런 말씀을 알게 해주신 부처님께 하염없는 경배를 드려야 하고 말이야. 허허허.”
소탈하게 웃으시는 스님은 대승기신론 강의뿐만 아니라 저술 활동을 통해서도 볼품없는 중생을 우주의 제왕인 부처로 환원시키기 위한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스님의 저술은 가벼운 에세이가 아니다. 모든 저술의 기준은 부처님 말씀, 즉 경전에 두고 있다. 극락세계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했다는 평을 받는 <극락세계 Ⅰ,Ⅱ> , 말세중생을 위해 남긴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인 《유언경》을 우리말로 쉽게 풀이한 <부처님의 유언> 등은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최근 집필한 <바이로차나Ⅰ>은 고려시대 야운 스님의《자경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무너져가는 수행정신을 얼음처럼 차갑게 일깨우고 있다. 현재 스님은 <바이로차나> 2권을 집필중이다.

“생활불교라는 명목으로 불교의 수준을 자신의 생활 정도로 끌어내리는 우를 범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생활이 우선시되고 세속의 삶이 바쁘면 불교는 잠시 뒷전이 되었다가 자기 생활에 필요하면 불교를 입맛대로 끌어다 쓰는 식이죠. 불교는 양념이 아닙니다. 불교는 인생의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불교를 생활화할 것이 아니라 생활을 불교적 가르침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사소해 보이는 말의 차이 같지만, 스님은 그 말의 차이에 주목한다. 불교의 가치가 확실해질 때, 부처는 저절로 공경의 대상이 되며 불교가 진정 생활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금을 캐러 갱도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목숨을 겁니다. 그들에게 금은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법 속에 들어와 무궁한 보물을 가지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목숨을 여기에 걸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불문에 귀명歸命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기신론에서 연유한 말입니다.”
스님은 자기 스스로 제물이 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로 이 중생세계와 다른 안락의 세계로 갈 수 없다고 단언한다.

“ 장미꽃 한 송이라도 가지려면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중생이
부처가되고자하면서도 그렇게 자신을 인색하게 다루는지 모르겠다”고 그 안이함을 질책하셨다.
중생은 수많은 고통에 허덕인다. 문제는, 그런데도 그들은 그 고통의 근원을 끊으려 하지 않는 데 있다. 매양 허겁지겁 임기응변으로 땜질하다가 힘에 부쳐 쓰러져 죽을 뿐이다. 그렇게 한 생의 삶을 가치 없이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면 대승기신론 해동소에서 그 영약의 해답을 얻어야 하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대담이었다.

원효센터는 작년 가을에 대승기신론 해동소 별기 강의만을 위해 4층 건물을 지어 개관했다. 현대적 감각으로 지은 건물은 세련되고 더없이 깔끔하여 사찰보다는 갤러리 같은 인상을 준다. 그곳에서 스님은 오늘도 사부대중들의 심기를 잔뜩 건드리는 질문을 거침없이 하고 계신다.

“정말로 불법을 믿긴 믿는 겁니까?”□

취재,정리 / 천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