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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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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 이해성/극작가 2008년 04월 314호
세상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무엇 세상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무엇
이해성/극작가

방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서니 훅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바짝 얼어 있는 새벽공기에 코끝이 시려왔다. 세상이 하얗다. 눈이 왔나? 하늘을 보니 별이 쏟아지고 있다. 맑고 투명한 별빛 사이에 보름달이 둥실 떠 있다. 달빛이 세상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얼이 나간 듯 멍하니 달을 봤다. 세상에. 교교하고 관능적인 달빛이, 유혹하고 설레게 하고 동하게 했다. 알 수 없는 욕망과 그리움이 일렁거리며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전설의 늑대가 꿈틀 깨어나고 있다. 차갑고 푸른 달빛. 새로운 만남은 꿈결처럼 몽롱하게 백색의 세계로 다가왔다.

2007년 12월 25일 성탄절. 노트북과 짐을 싸들고 서울을 떠나 가야산 골짜기로 찾아들었다. 홍제암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예불을 나서는 길은 그렇게 환한 달빛이 나를 흔들어 놓았다. 잊어버렸던 자연의 숨결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 척추를 곧게 펴고 타고 올라 뇌 속을 휘감아 쓸어내렸다. 해인광장(해인도가 있어서 내가 붙인 이름)에서 맞닥뜨린 법고의 가슴 벅찬 박동과 범종의 장엄. 대적광전에서 수십 명의 스님들이 신심으로 울려내는 새벽예불. 절을 하며 부처님께 감사하고 인복에 감사하고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그래, 이런 환경이면 불후의 명작을 쓰겠다. 잘하면 까짓 해탈까지도 하겠다. 그런 결기를 다지며 미간을 좁히고 눈에 힘을 주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몰골이 말이 아니다. 수염은 까칠하고 머리는 기름 범벅이다. 온수가 나오긴 했지만 세면장이 추워 씻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해가 중천에 올라서야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그만이었다. 머리는 딱, 한번 감았다. 무엇보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속가에서의 버릇 대로 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그나마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바람소리가 우우 들이치며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방문을 흔들어댔고, 가끔은 바람에 미닫이 문이 열리기까지 했다. 찬바람이 방문을 통과해 코끝을 지나 뒷벽으로 지나다녔다. 절집의 바람은 도력이 있는지 벽을 통과해 다닌다. 애써 잠을 청해 간신히 잠속으로 빠져들 만하면 그때, 목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기다 목탁소리가 점점 방 쪽으로 다가왔다. 점점 커지는 목탁소리를 따라 가물거리던 의식도 점점 또렷해졌다. 목탁소리가 온 경내를 돌아다니며 천지사물을 다 깨웠다. 목탁소리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겠다는 듯 학인스님은 최선을 다해 목탁을 쳤다. 천둥소리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초롱초롱 눈이 맑게 떠졌다. 시계를 보니 3시다. 젠장. 이불을 뒤집어 쓰고 다시 누웠다. 잠시 후 목탁소리는 멀어져 갔지만 목탁소리의 효험으로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설상가상 오줌까지 마렵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옷을 껴 입었다. 털모자에 장갑까지 꼈다. 소변 한번 보는데 중무장이라니.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던 화장실은 전설의 고향이다. 찬바람 맞으며 으스스한 화장실에 갔다 오면 정신이 그렇게 맑아질 수가 없다. 화장실을 다녀와 시계를 보니 4시가 넘었다. 불굴의 의지로 다시 잠을 청했다. 가물가물. 의식이 몽롱해지고 있을 때 또 뭔가 뎅뎅 소리가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밥 먹으라고 치는 종소리란다. 시계를 보니6시다. 6시에 아침을 먹으라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옷을 껴입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 지나자 톰크루즈처럼 눈이 퀭하니 어둡고 깊어졌다. 스님들의 생활에 맞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볼까도 했지만 습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하루는, 또 도량석에 잠이 깨 부아가 치밀었다. 도대체 저걸 왜 치는거야. 구시렁대며 화장실에 가 소변을 보는데 산신각으로 올라갔던 학인스님이 염불을 외며 내려오고 있었다. 심술이 올라 스님이 화장실 앞을 지날 즈음, 갑자기 앞으로 확 나서며 합장을 했다. 어어! 염불을 외던 스님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속에서 웃음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웃음을 꾹 참고 진지한 얼굴로, 수고하십니다, 스님. 다시 합장을 하며 인사를 했다. 스님은 놀란 얼굴을 수습하고 합장을 했다. 그리고는 급하게 목탁을 치며 암자로 들어갔다. 스님이 사라지자 배를 잡고 눈물이 날 정도로 키득거렸다. 아 통쾌해라! 스님도 무서워하는구나. 온 종일 혼자였다.

스님들은 묵묵히 자기소임만 다할 뿐 말 한마디 붙여주지 않았다. 암자에 스님들 말고는 미소만 짓고 있는 부처님밖에 더 있는가. 스님들은 경이라도 읽지. 무문관이 된 입안에서 혀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면벽만 하고 있었다. 얼마나 말이 하고 싶었으면. 방에 틀어박혀 있다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입은 스스로 소리를 내어 까마귀들과 대화를 했다. 까악. 깍깍.

열흘쯤 지나니 목탁소리의 효험이 떨어지며 잠에서 깨지 않을 수 있었다. 입에 몰려 있던 기운도 내려가 혀는 선정에 들었다. 모든 것에 적응이 되어갔다. 점심을 먹고는 암자를 한군데씩 순례하기도 했다. 상왕봉과 칠불봉도 올라보고 마애불과 남산 제일봉에도 올라갔다. 저녁예불은 빠뜨리지 않고 들어갔다. 한 학인스님이 108참회 기도를 매일 하시기에 따라 해봤다. 하다 보니 매일 하게 되었다. 처음엔 운동 삼아 했었는데 나중엔 마음이 움직였다. 사람들에게 준 상처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아파왔다. 어찌나 많던지. 절 한번 할 때마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참회했다. 앞으론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변해갔다.

홍제암에서 두 달 반을 보내고 지금은 다시 서울이다. 상경한지 일주일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황사가 몰아치고 있는 뿌연 도시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우울해졌다. 알 수 없었다. 보다 편리하고 안락한 집으로 돌아왔는데 왜 우울하지. 욕망과 걱정과 삿된 마음들을 절집에 두고 와서 먼지와 매연으로 탁한 속가에 적응하지 못하는 걸까. 승과 속이한 가지일 텐데. 몸과 마음이 간사하다. 속가의 탁함을 밀어내지 말고 끌어안아야겠다. 밀어냄과 끌어안음을 함께 가져다주는 새로운 만남은, 나를 거르고 변화시켜‘세상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무엇’으로 만들어간다. 절집에서 가져온 것을 펼쳐놓자. 108배를 해야겠다. 참선도 해야겠다. 언젠가는 뿌연 황사가 걷히고 높은 하늘이 맑고 푸르게 펼쳐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