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벗님들과 해인사 마애불을 찾았습니다. 삼월 초부터 시작한 해인사의‘자비행선’에 동참한 길이었어요. 해토머리 기운이 막 번지기 시작하는 즈음이어서 저는 마애불 행선을 좋아라 했지요. 제 느낌에 해인사 마애불은 봄도 아주 난만한 봄은 아닌, 겨울에서 막 봄으로 넘어갈 즈음의 경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니까요.
경계를 넘는 자에겐 힘이 필요합니다. 일상 속에서 조금씩 힘을 저축했다가 경계를 훌쩍 넘어서야 할 어떤 순간이 오면 강력하게 그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 저축한 힘이 없이는 우리 앞에 무시로 등장하는 경계와 벽들을 뚫고 가기 어렵지요. 흔히 말하는 중도中道가 파동 없이 늘 편편한 마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터.쉬어갈 굽이와 강력한 추동이 필요한 굽이를 적절히 파악하고 자신의 힘을 안배하는 지혜의 필요. 이것이 중도의 또 다른 몸일 수도 있다고 저는 여기는 편입니다.
스스로 짓는 일상의 모든 행위를 깨어 바라보는 일이 행선이니,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일도 실은 행선이겠지요. 꽃 한 송이 온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아이처럼, 세계와의 극진한 교감은 모두 행선입니다. 극진하면 나를 비우게 되지요. 나를 비운 자리에 그대가 들어와 쉬게하는 것이 행선입니다. 빈내 속에서 그대가 힘을 얻어 다시금 세상으로 나갈 때, 문을 박차고 나가는 그대의 발자국이 내 발자국입니다. 마애불 가는 산길에서 나는 숱한 그대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습니다. 봄물이 오르는 산속은 아주 살살 깨어나는 중이었는데, 사방에서 탄생게가 들렸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되는 이 말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말이 자만이나 교만함을 일컬을 때 사용되곤 하니 오용은 물론 왜곡이 몹시 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어찌하여‘유아독존’이 이기적인 자만과 연결되게 되었을까요. 말의 표층에 발목 잡혀 버린 우리 의식의 부박함도 한몫 하겠고, 독존해 본 경험이 없는 나약한 존재가 독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공포감도 한몫 할 것입니다. 해인사 마애불을 오랜만에 뵈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말이‘유아독존’이었습니다. 흔히 마애불의 걸작이라 부르는 서산마애불이 밝고 천진한 미소로 보는이를 무장해제시킨다면 해인사 마애불은 유아독존하는 기품을 오롯이 드러내면서 우리를 정신차리게 합니다.
고독하고 장려한 기품을 지닌 채 벼랑에 선 부처님. 자기 내면의 벼랑을 직시하며 가파르게 선 마애불의 유아독존은 무아와 대립하지 않습니다. 세상 만물은 모두 유아독존 합니다. 유아독존하는 내가 유아독존 하는 너를 배우고 서로를 비우고 채우면서 우주가 밝고 저뭅니다. 유아독존하는 모든 생명은 빠짐없이 평등하고, 고독하고, 귀합니다. 부처는 오로지 자신만이 세상을 구원 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이가 아니지요. 스스로 자기 고통을 응시하고, 다스리고, 이윽고 자유로 워지는 자입니다. 해인사 마애불의 무표정한 듯 당당한 자세는 홀로 자기 존재를 맞대면한자의 자유로운 홀로 있음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세상 만물 낱낱이 저마다 유아독존 하지 못할 때 조화로운 공생도 어려워집니다. 유아독존은 무아의 밑자리입니다. 온 힘을 다해 저마다의 생명을 움틔우는 목숨들에게 장하고 장하다, 벼랑에 선 부처님이 속삭여주는 목소리 듣습니다. 경계와 장벽을 넘어서는, 내가 그대가 되는 힘의 원천. 유아독존하는 꽃망울들 천지에 가득합니다.□
김선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