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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 탁자 속에 들어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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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광옥 2008년 03월 313호
행자, 탁자 속에 들어 있는데요!
광옥 / 전 전국비구니회 사회부장

나는 평양시 평양부 문수정 335-2호에서 아버지 선종도, 어머니 박준주의 맏이로 태어났다. 나의 군산 외갓집쪽에 출가한 분들이 여럿 계셨다. 큰이모님이 스님으로 계시면서 다른 이모님의 외사촌언니 세 사람이 큰이모님이 계신 절에 가서 스님이 되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쪽 세계가 항상 궁금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내가, 약을 한 제 지어서 어머니와 함께 이모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절로 간 것이 1959년겨울, 열일곱살때였다. 내 삭발본사가 된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사로 떠난 것이다.

의정부에서 소요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덕정리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는데 산중턱 오솔길에서 듣는 종소리가 가슴에 푸근하게 내려앉는 것이었다. 이모스님은 우리를 보자 무척 반가워하시면서, 전날 밤 꿈에서 청담 스님께서 행건을 치고 염주를 든 동자승을 가리키며‘저 애를 잘 길러라’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절에 있자 단박에 절집 생활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산과 기와집이 빚어내는 조화와 고요함이 좋았고 돌이 선명히 드러나 있는 맑은 개울물이 마음에 들었다. 스님들의 목탁소리가 그리도 좋았고, 먹물 옷은 또 얼마나 좋은지 신비한 보랏빛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스님께서 소설책을 내주셨다.‘ 사명대사’‘원효대사’‘이차돈’등 고승들의 삶을 마주하면서 그 겨울, 나는 결정했다.‘ 아 나도 스님이 되어야겠다’고. 특히‘사명대사’속의 보운, 보련 등 세 비구니스님들의 남해 보리암에서의 신선 같은 생활은 출가를 결정하는 데 충분한 동인이 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주지스님께서‘천수경’을 하루 만에 외우고‘반야심경’‘약찬게’‘시식’까지 거침없이 외우는 나를 지켜보시며 출가자로 만들려고 작정하시고 발심을 시키기 위해 책을 읽게 했다고 한다.

다음해 2월1일에 삭발을 하고 정식으로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공양주로 행자시절을 시작한 나는 날마다 어른 스님들께 혼나기 일쑤였다. 밥물을 얼마나 부어야 하는지 몰라 태우지 않으면 질거나 질지 않으면 되곤 했다. 지게를 지면 뒤로 넘어졌고 밭농사도 서툴러서 내가 도라지밭을 매면 백도라지가 청도라지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나는 트러블메이커였다. 보다 못해 주지스님이 불러‘너희 어머닌 못하는 게 없는데, 너는 왜 말 걸랭이(걸레) 설삶아 놓은 것 같으냐?’라고 꾸짖으셨다. 매일 불을 때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입고 있던 동방아는 새카매져서 연탄장사는‘저리가라’였다.
또 목탁을 치면서 하는 염불은 왜 그렇게 잘 맞춰지지 않는지, 하루는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절에 오셨던 아버지께서 부엌으로 조용히 오셔서는‘얘, 이왕 하려면 다른 분처럼 잘 해야지 않겠느냐. 네가 하는 염불은 쇳송이 아니라 영락없는 노래다’라고 충고해 주셨다.
그러나 그 시절, 끊임없이 솟아났던 신심 하나만은 최고였다. 새벽 3시 15분 전에 일어나 3시면 도량석을 돌고는 차관을 들고 쏜살같이 야산을 하나 넘어 골짜기로 달려가곤 했다. 내 발길이 머물렀던 곳은 가장 깨끗하고 맑은 약수가 있는 곳이었으니, 부처님께 가장 좋은 다기물을 떠 올리고 싶은 신심 때문이었다. 하루는 주지스님께서 부르셔서는,‘ 너, 옥수를 뜨러 거기에 가지 마라’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소견에, 다른 스님들께 피해를 주지 않는 일이 거니와 잠깐이면 다녀오는 길이니 가도 된다고 생각하고 다음날 또 약수를 떠다 부처님께 올렸다. 주지스님께서 다시 부르시더니‘, 너, 꼭 그곳에 가서 다기물을 떠야 되겠니? 그럼 내일 아침부터 그곳에 갈 때마다 머리를 돌려 지공 스님 사리탑을 한번 쳐다보고 가거라’하셨다.

회암사엔 지공, 나옹, 무학 삼대국사 스님의 비문과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다음날 새벽 지공 스님 사리탑을 쳐다보았을 때, 플래시보다 더 밝은 푸르스름한 빛이 쫙 나에게 비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호랑이 눈과 마주친 것이었다. 그런데 신심이 장해서 그랬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며칠을 더 골짜기에 가서 약수를 떠오곤 했다. 그때마다 여전히 호랑이 눈에서 나오는 불빛이 나를 따라오곤 했다.
나는 또, 남도창을 좋아하던 낭만적인 행자이기도 했다. 해서, 원주스님을 따라 장에 가는 날이면‘여성국극단공연 한번 보고 가자!’고 조르곤 했다. 그러면 원주스님은 철없는 행자를 데리고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영등포 극장 앞까지 갔다.“ 얘야, 시간도 없고 하니 포스터만 보고가자, 응?”하는 원주스님의 말씀에 공연 포스터를 보는 걸로 반쯤 만족하고 돌아오곤 했다. 참외며 과일 등 찬거리를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멀었다. 그러나 아무리 신심이 장했어도 내 출가의 길을 위협하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쏟아지는 잠이었다.
하루는 아침 공양을 하고 난 후‘한 30분만 잤으면’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끝에 찾아낸 곳이 큰방(선방) 탁자 속이었다. 방석까지 가지고 들어가 얼마나 자고 일어났는지 느낌이 이상했다. 밖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공양시간이었다. ‘공양주인데 내가 잠을 잤으니 어떻게 하지?’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나갈까, 공양이 끝나고 아무도 없을 때 나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지금이나 그때나 양명한 것이 내 체질인지라 더 이상 숨어 있지 못하고 소리쳤다
“ 행자! 탁자속에 있는데요?”
그렇게 소리치고는 탁자속에서 슬며시 기어나왔다. 그런데 세상에, 그 시간은 점심공양도 아니고 저녁공양 시간인 것이었다. 밀린 잠을 다 자고 나온 것까진 좋았으나 영락없이 쫓겨날 판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 잘 되었다. 이참에 집으로가자.’밥하고 빨래하려고 출가한 것은 아닌데 만날 떡방아 찧고 물 긷고 무명옷을 손질해서 다려올리면 다시 양동이로 들어가기 일쑤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던 참이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도망가긴 싫었고, 평생 그 일을 하고 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쏠려 있을 때였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아, 그런데 되게 혼낼 줄 알았던 스님들께서‘, 아이구, 우리행자가 피곤해서 거기서 잔 모양이로구나’하고 위로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들으니, 하
루 종일 행자 하나가 보이지 않자 스님들이 마을 사람들을 풀어 온 산을 뒤지게 했다고 한다. 천보산이 이북으로 연결되어 있어 호랑이가 오갈 때였다. 그랬으니 하루 종일 찾아도 사람은 안 보이고, 어른스님들이 얼마나 놀라셨겠는가. 덕분에 그 유명한 사건은 위로와 함께 마무리 되었다.

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환갑 때 출가의 길을 돌아보니, 20년을 잤고 남산덩어리만큼 먹은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먹고 자는 데 애착을 갖지 않고 방석 하나와 씨름하고 있다. 쉬지 않고 공부해도 열리지 않는 것이 출가의 길 아닌가.
계를 받고도 강원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가, 어른들이 숙제로 내준‘금강경’을 일자일배를 하면서 한 번 다 베껴 쓰고, 동두천으로 탁발을 나가서 역경계, 순경계에서 일어나는 내 마음의 흐름을 감지하는 경험을 한 다음 오매불망 고대하던 강원으로 갔다. 상복대야, 하복대야를 준비하고 이불과 책을 싸서 동학사 강원으로 가‘초발심 자경문’을 배우면서 다시 뜨겁게 발심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경전을 익히며 얼마나 신심이 솟아나던지 삼경을 치는 소리에 잠자리에 누웠다가 한 시간쯤 지나면 살짝 밖으로 나와 계룡산에서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를 음미하곤 했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앞에 서서‘정말 내가 출가하기를 참 잘했구나’하고 얼마나 나 자신을 대견해했던가.
중 노릇을 잘하는 사람이 긴 머리를 잘라줘야 한다고 해서 회암사 입승이셨던 응민 스님께서 삭발을 해주시고 지호스님을 은사로 출가자가 된 지 어언 오십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국땅 캐나다에서 젊음을 바쳐 한국불교를 포교하면서30여년을보냈다. 이순의 나이를 훌쩍 넘어 되돌아 보니, 세상에 나서 마음자리 찾는 일 빼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남은생, 가능하면 일체 중생을 위해서 보답하리라.
젊어서부터 21세기식 천년 고찰을 지어서 후래인에게 남기고 싶었는데 인연이 닿아 그 서원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정진 열심히 해서 내생엔 극락세계 상품상생에 태어나리란 서원도 함께 발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