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염원을 담아 불을 밝힌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해인성보 - 해인 편집실 2008년 03월 313호
해인사지원10년고려옥등년명고려옥등海印寺至元十年銘高麗玉燈 염원을 담아 불을 밝힌다. - 정미경 / 해인사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

불은 사람들이 생활을 하는 데 있어 어둠을 밝히고,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며,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생활용구를 만드는 생산 활동에 이르기까지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燈火)과 같은 등화구燈火具는 편리함과 함께 활동의 폭을 넓혀주었다. 등불은 불을 켜서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을 모두 이르는 말로‘등화’라고도 한다. 따라서 등화구는 불을 붙여 어두운 곳을 밝게 하는 조명 기구인 셈이다. 등화구는 사용된 재료나 형태 또는 용도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린다. 기름을 담아서 불을 켜는 등잔燈盞, 등잔을 얹어서 사용하는 등경燈, 초를 꽂는 촛대(燭臺), 들고 다니는 제등提燈, 걸어놓는 괘등掛燈과 현등懸燈, 실내 바닥에 놓는 좌등坐燈으로 나눌 수 있다.

등잔은 사용된 재료에 따라 토기土器, 도자기陶瓷器, 옥석제玉石製로 나누어지며, 형태별로는 종지모양, 박모양, 그릇모양 등이 있다.
옥석제의 종지모양 등잔은‘옥등玉燈’또는‘석등잔石燈盞’이라고도 부르는 궁중용이지만, 사찰에서 쓰는 것은‘선등禪燈’, 무당들이 사용하는 작은 형태의 인등引燈과 대형으로서 일반이 사용한 현등懸燈이 있다. 이런 등잔의 심지는 한지를, 기름은 참기름을 사용한다. 등잔은 고려시대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많이 만들어졌다.
등화구는 밤에 불을 밝히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성대한 궁중의례나 제사, 혼례와 같은 의례에도 빼놓을 수 없었다. 연등과 같은 불교행사, 동제洞祭나 굿 등의 의식에서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공간에서 등은 기원과 염원을 담아내는 상징적인 의미의 불을 밝히기도 하였다.
불교에서 옥등의 의미는 단순히 불을 밝히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중생들의 어리석은 마음에 등불을 밝혀 괴로움을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광명등’이라 부르며 귀중하게 여겼다.
또한《고려사高麗史》기록에 의하면 전등사傳燈寺는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11년(381)에 창건되었고 그때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 이후 고려 충렬왕忠烈王8년(1282)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貞和公主가 경전과 옥등을 시주하면서 절 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해인사성보박물관에는 크기가 40㎝ 정도의 대형‘해인사지원 10년명고려옥등海印寺至元十年銘高麗玉燈’이 있다. 등잔에는 3개의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끈이나 철사를 연결해 연등처럼 매단것으로 여겨진다. 해인사지원 10년명고려옥등에는 해인사에서 불을 밝히는 공덕으로 선망부모의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특위성수천장지원선고생정토제자무제난액종생정토법계생망공오무생조성대옥등일개현우해인사지원십년삼월일상주목사이숙립特爲聖壽天長之願先考生淨土弟子無諸難厄終生淨土法界生亡共悟無生造成大玉燈一箇懸于海印寺至元十年三月日尙州牧使李淑立
특별히 임금님의 만수무강(聖壽天長)을 위하여 발원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토에 태어나고, 제자弟子가 여러 재난 없이, 마침내 정토에 태어나고, 법계法界의 죽고 산 모든 이들이 함께 무생無生을 깨닫기를 발원하면서 큰 옥등 1개를 조성造成하여 해인사에 매달았다. 지원至元 10년(1273, 원종 14) 3월일 상주목사尙州牧使이숙李淑이 세웠다.”

명문의 내용을 보아 충성스럽고 효심 깊은 신하가 임금님과 조상님을 위해 옥등을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사찰에 오는 이들은 가족이나 각자의 염원을 담아 연등을 달기도 하는데, 그 마음은 아마 옛 선조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