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해인사 문수암 원철 스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호계삼소 - 배지선 2008년 03월 313호
원철스님 해인사 문수암 원철 스님

해인사에서 수계를 하고 사형이 있는 절에 인사를 갔다. 사형은 기다렸다는 듯이‘마침 나한전에서 예불하던 스님이 잠시 출타했으니 대신 삼일 기도를 하겠느냐’고 넌지시 물어왔다. 기도를 통하여 초발심을 다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예’하고 대답을 하고는 엉망인 염불소리지만 나름 열심히 호기있게 기도를 했다. 이튿날 차를 나누며 사형은‘나한전에 나한 닮은 스님이 열심히 기도하고 있더라’는 말을 누군가 와서 전해주더라고 했다. 이십년도 넘은 원철 스님의 이야기다. 착한 나한을 닮은 스님은 웃을 때마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면서 더욱 마음씨 좋게 보인다. ID를 만들 때‘네오 아라한(Neo Arhan)’을 줄여 네오한(neohan)으로 하였으나 이미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neo 원철’을 줄여서 네오원(neoone)으로 만들었다.

해인사 버스 종점에서 마장馬場 가는 길을 따라 승용차로 5분쯤 올라가면 삼정 마을이 나온다. 해인사를 창건한 애장왕을 따라온 세 명의 정승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하여‘삼정’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마장은 그때 행차를 함께 했던 말들을 묶어놓았던 곳이다. 모두가 창건과 관련된 1200년 된 지명인 셈이다. 현재 십여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동네인데 몇 년 새에 암자가 4개나 생겨 새로‘절골’이 되었다. 그 중에는 문수암이 가장 오래 되었다. 무려 3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원당암에 살던 혜은 스님(작고)이 개인토굴로 처음 지었고, 그 뒤 원학 스님(현 총무원 총무부장)이 십여년간 머물면서 아름다운 조경을 갖춘 아담한 토굴로 가꾸었고, 그후무비스님(전교육원장·범어사)이 살면서 예쁜‘꽃미남’부처님을 인법당에 모셨다.

원철 스님은 이 토굴과 인연을 맺은 지 6년쯤 된다. 외형은 절이라기보다는 민가에 더 가깝다. 매달 세 번째 일요일은‘경전법회’가 열린다. 이 암자의 유일무이한 법회이다. 문수법회 회원들은“누각인 간월정看月亭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면 신선의 경지가 따로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자랑한다. 법회에는 부부가 보통 함께 온다. 그렇다보니 거사가 참석인원의 절반쯤 된다. 거사님이 와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더 대접받는 분위기라고 했다. 그리고 법회는 원철 스님의‘주전공’인 경전을 함께 읽으면서 강의와 질문을 하는 강독 형식을 유지해오고 있다. 문수법회 회원은 기도와 신행은 주로 큰절인 해인사를 이용한다. 큰절에 들러 행사를 마친 후 여기에 와서 담소를 나누고 차를 마시니 사랑방 암자인 셈이다. 그리고 주인 스님이‘나가서’산지가
4년을훨씬 넘겼다. 그래서그들이사실 주인이다. 법회날은‘서로알아서’꽃과 과일떡도 올리고 공양 당번도 정해진다. 원철 스님은 이들에게 마음의 빚이 많다. 그래서 법회만큼은 충분하게 연구하고 준비해온다. 교재도 일일이 복사하여 참석 인원 만큼 나누어준다. 스님과 함께 온 부지런한 최 처사는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6년째 혼자서 밥해 먹으며 자기집처럼 토굴을 정성껏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 도량은 늘 정갈하다.

원철 스님은 해인사강원, 실상사화엄학림, 그리고 동국대(경주)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후학들에게 강의한 경력이 도합 8년 가량 된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했다.
스님은“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스님이 아는 것은 학인도 알고 학인이 모르는 것은 스님도 몰랐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 한 부분은 꼭 질문이 들어와 난감했던 일이 많았다. 그래도 스님은 최선을 다했다. 몰라도 가르쳐야 하는 것이 강사이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경을 보는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스님의 결론은“남 앞에 서보니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고, 또 좀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들 뿐이었다”는 것. 그래서 은해사승가대학원을 마쳤고 내친김에 동국대 선학과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다. 스님은“그 덕분에 경전과 선어록은 나름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 말했다.

혜홍각범(1071~1128)의《선림승보전》은 총 30권이다. 일본 경도대학의 야나기다(柳田聖山) 등 몇 분이 공동으로 일본어로 번역을 시도하였는데 5권까지 하고는 작업이 중단된 상태였다. 그래서 사명감을 가지고 3년에 걸쳐 한글로 완역하였다. 상권은 은해사에서, 하권은 실상사에서 완성했다. 3년쯤 걸린 지난至難한 작업으로 국내에선 처음 번역하여 두 권의 두툼한 분량으로‘도서출판 장경각(대표 원택 스님)’에서 출간했다. 이때 무리하면서 허리디스크가 생겨 한방병원에 한 달 가량 입원까지 했다. 스님은“이후‘체력이 법력’임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며 웃음지었다.

스님은‘글잘쓰는이’로통한다. 그 이유는 선종의 안목으로 주간인 교계지에 몇번의 연재를 한 까닭이다.
몇 년 전엔 종단기관지에‘선종의 주지론’을 테마로 일 년 동안 연재했다. 현대불교신문에‘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라는 코너에 선사들의 재미난 일화를 중심으로 무려2년 동안 필력을 드날려 그 내공을 제방諸方에 인정 받았다. 작년에는 불교 신문에 대사회적 문제에 대하여‘동어서화’라는 타이틀로 선종적담론을 선보이기도 했다. 올해는 월간지〈불광〉에‘선어유희’란 제목 아래 선시를 대중화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간지도 심심찮게 원고 청탁이 들어 온다. 서울 신문에 1년 6개월, 경향신문에 1년째 매달 칼럼을 올렸다. 또 부정기적으로 여기저기 다른 신문에도 얼굴을 내놓았다. 덕분에 주변에서‘조계종 제일논사論師’라는 덕담까지 들었다. 또 책을 내자는 제의도 여러 번 받았다. 몇 년째 사양하다가‘지나친 겸손은 교만’이라는 생각이 들어 올 봄에는‘명품’들만 추려 단행본을 낼 계획이다.

스님은 언젠가 한 경제지의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저녁 9시에 원고청탁을 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12시까지 마감시켜 달라고 했다.‘ 스님이면 충분히 쓸 수 있다’는 꼬드김과 함께. 전후사정은 묻지 않는 게 예의인지라 응락했다는 스님. 새벽까지 끙끙 거렸다고 한다. 편집장을 해 본 까닭에 이럴때 아무말 않고 도와주면 두고 두고 감사한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스님은 덕분에 그야말로‘하늘 아래 쫓기지 않는 명문名文이 없다’는 말을 실감했단다. 그 글은 지금 읽어도‘속성’치고는 그런 대로 마음에 든다는 스님의 말씀이다.

스님은4년 전 봄에 산사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이른바‘수도승’이 되었다. 수도하는 승려가 아니라 수도 인 서울에서 사는 승려가 된 것이다. 그동안 스님은 가야산 팔공산 지리산 등 명산대찰에서만 살았다. 그래서 스님을 안다는 도반들은 석달 만에 낙향할 것이라고 했단다. 그러나 스님은 도심을 산으로 생각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시정의 삶이 괴로울 때마다‘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사는 곳에서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진리의 수행처이다)’이라는 임제 선사의 말을 떠올렸다. 모나지 않은 성격에 성실함은 총무원의 신도국장 기획국장 재정국장 등‘장수국장’으로 여러 부서에서 실무자로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소임 이외에도‘전공을 살려’신도임원에게‘조계종도로서의 정체성’교육과 본말사 주지연수 및 불교인재개발원의‘간화선 프로그램 운영’의 강사로 나서기도 했다. 두 강좌를 통해 스님은 조계종이 선종으로서의 정체성을 보다 분명히 해야 함을 늘 강조했다. 국민소득 2만달러가 넘으면 자연스럽게 모두가 마음공부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21세기에는‘수행’프로그램을 통한 포교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획기적인 교세증장의 호기가 될 것이라는 스님의 믿음은 거의 확신에 가깝다, 또 한국불교를 세계에 소개하는 한국 전통사상서 간행사업 프로젝트에 간행 위원으로 일조하고 있다.


지난 설날 스님은 큰절에 세배를 갔다.‘ 한번 보자’는 주지 현응스님의 부름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현응스님은 월간 <해인〉주간을 맡아 달라고 했다. 좀 더 전문화 되고 불교적 안목으로 시대문제를 고민하고 불교적 대안을 모색하는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잡지를 만들어달라는 주문과 함께. 해인지와 스님의 인연은 편집위원 10여년 편집장 3년이라는 경력에서 보듯 스님은 이 잡지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기도 하다. 편집장 시절 원당암 혜암문도회 후원으로 전체 해인지를 전산화하여〈인터넷 월간 해인〉을 오픈하고 장난삼아 검색을 해보니 성철 큰스님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많은 글을 올린 필자로 랭크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끄레’에 의뢰하여 책 전체 디자인을 일신하면서 현재의 해인지 모습으로 만들었다.
온라인 오프라인에 걸쳐 시대의 요청에 의해 대대적으로 손을 보았던 것이었다. 해인을 통해 만난 많은 선배 동료 후배스님들 그리고 재가의 필자기자 그리고 관계자들은 지금도 스님의 든든한 인맥이요 조언자요 상담자이기도 하다.
사회와 소통하는 그런‘새로운 류’의〈해인〉을 만들어보자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이래저래 변신을 위한 일거리와 고민거리를 화두로 삼고 있는 이즈음이다. <해인>이 어떻게 바뀐 옷을 입고 알찬 내용을 가지고 독자 앞에 다시 등장할지 지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