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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피워 올릴 한 송이 꽃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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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곽영숙 2008년 03월 313호
목련 세상에 피워 올릴 한 송이 꽃을 위해 - 곽영숙/해인사수련동문


오랜만에 화분에 물을 주었다.
햇볕이 순한 탓에 화분에 물주기를 게을리하다보니 어느새 스파티필룸과 스킨답서스 잎이 처져있다. 한참 만에 물바가지를 들어도 되는 관음죽과 산세베리아는 아직도 그렇게 용맹스레 싱싱한 잎을 뻗치고 있다.

올해로 열여덟 번째 봄을 같이하는 관음죽은 제법 식구를 늘려 베란다를 무성히 채운다. 큰애 다섯살 봄, 분가를 하며 겨우 두 촉의 자그마한 화분을 들여놓은 것이 인연이 되어 틈틈이 흙갈이도 해주고 분갈이도 해주었더니 꽤나 식구를 불려놓았다. 그 사이 꽃도 몇 번 보여줬으니 겨우 물주기나 한 것에 비해 참 많은 것을 받은 셈이다. 흙갈이 때 보니 뿌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아기의 포동포동한 발을 보는 느낌이다.

재작년에는 눈이 간혹 뿌려지는 추운 어느 날 화단에 버려진 관음죽 뿌리를 집에 들여놓았었다. 밑동만 남아 있는 게 어쩐지 살아 있을 것 같기에 빈 화분 하나에 심었더니 올해는 벌써 네 촉의 아담한 잎을 화분 위에 제법 근사하게 올려놓았다.
빨래를 널거나 걷을 때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지켜보곤 했는데, 어느날 인사라도 하듯 손을 삐죽이 흙위로 내밀어 얼마나 반갑고 신났는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애쓰고 있었을 녀석이 어찌나 대견스러웠는지….

늦봄이라도 기지개 켜고 나와 주는 건 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을지모르겠다.

봄이 가까이 왔다.
볼을 스치는 바람결이 섬유유연제로 세탁한 잘 말린 실크 스카프같다. 어디선가 풋풋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벌써 시작된 걸까?

다른 계절과 달리 봄은 그 시작을 매번 놓치고 만다. 꽃이 피는 것을 보고‘봄이구나’한다. 꽃도 나름 피는 시기가 달라 며칠 집 안에 있는새 언제 꽃이 피었는지 알지 못한 채 봄날이 가곤 한다. 올 봄은 좀 부지런히 눈인사를 하고 다녀 짧은 봄의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야겠다.

한 달에 한 번 해인사수련동문회법회를 위해 해인사로 가는길, 사방이 콘크리트 건물과 검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에서 벗어나 88고속도로로 차를 올리면 다른 고속도로보다 더 가까이 보이는 산과 들에 풋풋함을 느껴 한 달 한 달이 새롭다. 보리보다 양파와 마늘이 더 흔해진 논에 파란 잎이 추운 겨울을 잘 견디고 납죽이 앉아 있다. 누군가가 마늘을 보고 알로에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쿡~”웃음이 터진다. 하긴 좀 닮긴 했다. 가시만 없지 어린 마늘과 알로에는 어딘가 닮은 것 같다.

어릴 적 봄, 작은 들꽃과 잔디로 덮인 언덕을 보면서 마른 풀잎만 터벅하던 그 황량한 겨울의 그 언덕과는 다른 언덕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겨울의 그 언덕이 이 언덕이고, 그 나무가 이 나무란 걸 다 알아버린 지금은, 새삼스레 감탄은 않지만 마음 한곳에 떡 하니 자리 잡은 삶에 대한 순응이 대신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어느덧 헛된 꿈도 접고, 나와 화해하면서, 물음표보다는 느낌표로 지내고 있는 나를 본다. 올 봄 난을 분갈이 할 때는 난 뿌리만 정리할 게 아니고 내 마음의 썩고 죽은 뿌리도 정리해야겠다. 하얀 뿌리들 사이로 묵혀진 검은 뿌리를 가위로 자르며 내 오만과 편견, 구태의 연함을 잘라야겠다.

수행한답시고 뛰어다녔던 몇 년의 세월, 참으로 정진하였던가? 부끄럽게도 삼천배를 하며 육체의 고통에만 절절맸다. 참선을 한다며 앉아 번뇌 망상만 쫓아다녔다. 따스한 감정 보다는 차가운 이성의 잣대로 재고 재면서 겉으로만 수행하는 사람이 되려했다. 부끄러운 속내를 들여다 보기 싫어 그냥 뒀더니 그 사이 굳은살이 군데 군데 박혀 버렸다.
어린 시절, 장독대 옆 화단에 봄이 오면 엄마는 장미 줄기와 다알리아 꽃 뿌리를 덮어놓았던 짚을 걷어 내시고 호미로 주변의 흙을 메워주셨다. 다져진 흙은 따스한 봄 기운이 들어가 이내 고운 콩고물같이 부드러워졌고 사각사각거리는 엄마의 가벼운 호미질소리가 장독에 반사된 햇살에 부딪혀 앞마당 가득 조용히 퍼졌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고운 흙가루를 헤치며 새싹이 나오고 장미가 묵은 줄기에서 빠알간 새 잎을 쏙 내밀었다.

이제 내 마음밭을 가꿔야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엄마도 호미질을 해주지 않는다. 겉치레 정진이 아닌 참 수행자가 되기 위해 육바라밀을 행해야겠다. 계를 지키고 주변에 따스한 마음을 내고 참고 정진하는 생활인이 되면 내게도 작은 꽃송이 하나 피울 수 있는 자비를 주시지 않을까?

꽃은 이 봄에만 피는게 아니다.
여름ㆍ가을ㆍ겨울, 그리고, 또 다시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세상이란 화단에 내가 피워 올릴 한 송이 꽃, 그 꽃을 정성껏 부처님 전에 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일까?
이번 주말에는 가야산으로 가서 새벽 종소리로 봄을 열 것이다.
남은 겨울의 잔재를 털고 다가오는 봄을 맞으리라.

종각 옆 목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