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에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 참석했다. 1948년에 봉암사로 출가한 인연으로‘봉암사 결사와 청담 대종사’란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반세기도 더 전인 60여 년 전을 회고하다보니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형님이 문경의 한 광업소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그곳에 갔다가‘절 구경 가자’해서 봉암사엘 놀러가게 되었다. 당시 불교라곤 전혀 몰랐다. 그런데도 스님들이 장삼을 입고 독경하고 있는 모습이 그리 신비롭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저 스님들은 무엇을 하는 분인가 궁금해 하면서 이리저리 절 구경을 하고 돌아 다니다가 마당에 나와 계시던 한 스님을 만났다.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채 스님께 여쭈었다.
“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신가요? 왜 이렇게 이상한 옷을 입고 있습니까? 여기서 생활하는 목적이 뭐죠?”
신비함을 자아내며 마치 신선처럼 보였던 그 젊은 스님은 당신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광채가 가득한 눈으로 스님께서 물으셨다.
“절을 둘러 본 소감을 말해 보아라.”
“신선 공부를 하시는 겁니까?”
스님께선 그게 아니라고 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생은 무상한 것이다. 사람들은 백년도 살지 못하면서 천년 살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산다. 인간에겐 생사 문제가 제일 급하고 중요한 것인데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절에서 수행한다.”
그 말씀을 듣고 다시 얼굴을 보니 인상이 더욱 신비롭고 범인이 아닌 것 같았다. 스님께선 불교와 인생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일본에 젊은 국사가 된 스님이 있었다. 그분이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 제가 출가목적을 달성하고 젊은 나이에 국사가 되었으니 장하지 않습니까. 자식에 대한 긍지를 갖고 칭찬해주소서.’이 편지를 읽고 어머니가 답장을 보냈지.‘ 네가 후세들에게 피안에 이르는 다리가 되어주길 바랐더니 이 세상의 명리승이 되었구나. 슬프도다.’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그 젊은 국사는 사표를 내고 정진을 하였다. 그렇듯 큰 지위도, 큰 부자도 죽는 데 있어서는 소용없는 것이다. 불교를 믿고 수행해서 생로병사를 해탈해야 한다.”
일본의 그 젊은 국사 이야기를 얼마나 감명 깊게 들었던 지나중에 일본 글로 된 원문을 전부 외웠다.
스님께선 나에게 가족상황을 물으시고는 은근히 출가를 권하시면서‘자 이것을 한번 외워봐라’하고‘대각누각다라니’를 내놓으셨다. 잠깐 나가신 사이 그것을 외웠다. 10분 만에 들어오신 스님은‘머리가 괜찮구나’하시면서 반야심경과 관세음보살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고 북망산가를 얘기해주면서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무상한가를 깨우쳐주었다. 부처님께선 성불을 하셔서 중생을
구제한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시면서 다시 한 번 출가를 권하셨다.
첫 번의 만남에서 출가의 길로 이끌어 주었던 그 젊은 스님은 바로 성철 큰스님이셨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청담 스님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이끌고 계시던 성철 스님은 그 첫 만남의 자리에서 내 마음을 흔들었고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출가의 뜻을 비추었더니 유교적인 사고방식의 두 분은 이해를 하지 못하셨다. 결국 형님의 도움을 받아 출가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형님은 불교가 발달한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불교가 얼마나 수승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불교는 위대한 종교입니다. 보내세요’하면서 부모님을 설득했고‘네가 원하면 가라’라고 격려해주었다. 집에 돌아온 지 일주일 후 봉암사로 들어갔다.
1948년 봄, 봉암사엔 결사에서 단행한 불교개혁이 시행되고 있었다. 산신각, 칠성각 등의 탱화는 없어진 뒤였고 목발우 대신 철발우를 사용하고 있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위패를 놓고 반야심경 한 편만을 독송할 뿐이었다. 예불을 할 때에는 이산선사 발원문을 읽었고 108배 참회를 했으며 능엄주를 전부 독송했다. 나는 10일 만에 능엄주를 외우면서 봉암사의 장엄한 결사에 동화되어가고 있었다.
봉암사 대중 모두가 하루에 한 번씩 나무를 한 짐씩 해서 져날랐다. 나무하는 일은 나의 사형이 된 혜명 스님이 총괄하였다. 경험이 없어 지게질에 서툰 나를 위해 사형은 나무하는 일을 많이 도와주었던 기억이 난다. 운력을 할 때도 모든 대중스님들이 나와서 함께 했다.‘ 일일부작일일불식’이라는 백장청규의 정신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보름마다 포살을 했다. 포살을 할 때에는 자운 스님께서 계를 설하셨고 1천배씩 절을 했는데, 나의 은사이신 청담스님께서도 꼭 함께 하시곤 했다.
수행의 일환으로 모든 대중이 탁발을 나갔다.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도 탁발을 나가시곤 했다. 나는 웬일인지 탁발을 나가면 잘 되어서 쌀이 무거워서 예천에 있는 포교당에 쌀을 주고 3분의 2는 돈으로 받아 오기도 했다.
봉암사엔 감이 많이 열려서 가을이면 대중들이 나서서 감을 땄다. 창고에 가득 넣어 놓고 먹었는데 1949년 겨울에는 빨치산들이 들어와서 그것을 다 가지고 간 일도 있다.
행자시절에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다. 공양주를 했던 혜조라는 행자가 있었다. 어느 날 누룽지가 많이 남아 시궁창에 버렸나 보다. 그런데 그만 그것을 성철 스님이 보시고 말았다. 시궁창에 빠진 누룽지를 다시 주워 씻어서 물에 불리고 삶아서 온 대중이 먹었다. 그렇게 대중 모두 철저하게 살았다. 성철 스님께선 나이에 상관 없이 정진을 잘하지 못하는 대중에겐 가차 없이 경책을 하셨다.
수행자 정신이 예리하게 서 있던 봉암사 결사 한복판에서 행자시절은 물론 초발심 시절을 보내는 복을 누렸다. 봄에 들어가 가을에 계를 받았다. 어린 소년에게 한껏 매력을 뿜어내며 출가의 길로 이끌어준 성철 스님은‘나는 아직 상좌를 둘 나이가 안 되었다’고 하시면서 당신의 도반이자 평생 동지였던 청담 스님을 은사로 삼게했다. 그래서 나는‘인욕보살, 자비보살’로 불리면서 한국불교사에 큰 획을 그었던 청담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나의 은사스님은 늘 대중과 함께 정진하셨다. 주무실 때도 큰방에서 대중과 함께 하셨던 분이다. 그때는 행자들이 묵을 방이 따로 없어서 나도 큰방에서 잤는데, 잠을 자다 깨보면 내 다리가 은사스님의 가슴에 올라가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스님은 어린 행자의 발을 들어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아주셨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참, 큰 감동을 받았다. 나이 들어 돌이켜 보니 그런 모습이 도인의 행동이 아니었나 싶다.
은사스님께선 새벽에 일어나 예불드리고 운력하고 참선하면서 종종걸음치는 행자인 나에게 늘 그러셨다.
“ 네 마음 자리를 찾아라.”
일흔이 넘은 지금도 스님께서 일깨워주신 그 마음자리를 온전히 찾지는 못했으나 은사스님의 그 엄격하면서도 자비스러웠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런 스님과 함께 했던 곳이기에 봉암사는 내 마음의 고향으로 각인되어 있다. 은사스님은 나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들과 길을 갈 때 혹시 누가 와서 나를 두들겨 팬다 하더라도 너희들은 절대 그 사람과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스님! 인과를 믿으십시오’라고 해야한다.”
은사스님께서 사셨던 세월을 살아보니 알겠다. 인과를 알고 믿는 것이 지고한 진리요 불교임을 은사스님은 상좌인 나의 장삼을 다려주시기도 했다. 황송해 하는 나에게 그러셨던 분이다.“ 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것도 다려준다.”
무아와 하심의 인욕정신을 철저히 실천하셨던 대선지식이었다. 인욕이란 자기를 온전히 버렸을 때 가능한 것, 즉 성불할 때 인욕은 성취되는 것이다. 인욕을 성취하셨던 은사스님을 만나 출가의 길을 걸은 것을 감사히 여기며 행자시절을 돌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