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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님 덕에 부는 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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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음악산책 - 이미향 2007년 12월 310호
나발 원님 덕에 부는 나발 -이미향

늦가을 청명한 하늘을 타고 상큼한 햇살을 벗삼아 하늘 하늘 노오란 은행잎이 전나무 넓은 가슴으로 내려 앉는다. 오늘 아침엔 그 은행꽃 위로 하얀 눈이 쌓여 은세계를 펼쳐 놓았다. 나각이 청량한 여름 숲을 열어주는 바다 소리라면 나발은 깊은 겨울 심산 흰 눈밭을 깨우는 하늘의 소리다.

나발은 한자로는 나팔喇叭로 표기하지만 읽을 때는 억센 발음을 피해서 조선 후기 이후 나발로 불리워져 왔다. 나무나 쇠, 또는 동물의 뼈로 만든 긴 대롱의 끝에 나팔꽃을 살짝 꽂아놓은 것 같은 모양의 관악기이다. 언뜻 보면 태평소와 모양이 비슷하지만 태평소가 여러 음을 낼 수 있는 선율악기인데 반해 나발은 한 음밖에 내지 않는 단순한 구조와 소리를 지녔다.
나발의 길이는 일정하지 않지만 1미터에서 1미터 20센티 정도이며 태평소처럼 지공이 없기 때문에 선율 연주는 할 수 없다. 연주할 때는 오른팔을 수평으로 뻗어 손등이 아래를 향하게 나발을 잡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리거나 허리에 얹는다. 그렇게 자세를 잡은 다음, 취구에 입술을 대고 입김을 힘껏 불어넣어 소리를 낸다. 다른 악기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불분명한 음정이 오히려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독특한 음색의 악기이다.

나발이 언제부터 불교의식에서 연주하게 되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감로탱화에는 태평소 원님 덕에 부는 나발와 함께 나발을 불며 제단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감로탱화는 조선시대부터 활발하게 제작되어 유포된 불교회화다. 감로탱화에 나발연주 모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후대부터인데 이것은 불교의식이 후대로 오면서 점점 화려하고 성대하게 발전 되어가는 과정과 연관이 있다. 이때 군악이나 민간에서 연주되던 나발이 태평소나 징과 함께 불교의식에서도 수용하게 된 것 같다. 감로탱화에 나타난 나발을 지금도 제법 규모가 큰 불교의식에서 손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여름, 낙동강가 김해 선무암에서는 이틀 밤낮을 두고 생전예수재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런 대규모 불교행사에는 서울에서 전문악사들이 초청되는데 허리북, 자바라, 나각, 나발로 구성된 네 명의 악사들이 의식을 더욱 장엄하고 화려한 불국토의 세계로 인도해주었다. 양쪽에 새 깃털로 장식된 노란색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걸치고 허리에 선명한 청색 띠를 두른 악사들은 언덕 아래에 마련된 시련터로부터 대웅전 앞의 의식장소로 시련행렬을 인도하고 나비춤의 반주음악을 생생히 들려주기도 하고 법사스님 행차를 알리는 등 제반의식에서 두루 그 역할을 충실히 다 하고 있었다. 나발은 새색시 같은 나각 옆에 다정히 앉아 위엄을 부리며 흥앵- 흥앵-, 여유있게 또는 급하게 뚜우- 내지르며 나각을 재촉하기도 하였다.

나각과 나발은 참 사이 좋은 오누이와 같다. 선무암에서 들은 나발과 나각의 다정한 어울림의 향연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 잔잔하게 남아 있다. 구불구불 유장한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자연 속에서 자연의 소리를 사심 없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한 소리를 연발하는 나발소리는 복잡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우리네 삶과는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런데 나발을 사용한 관현악곡이나 합주 때에는 미리 작곡자가 음정을 정해주거나 사전에 관의 길이에 따른 음정을 챙겨놓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트럼펫과 같이 여러 음을 낼 수 있도록 피스톤을 부착한 나발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나 아직 많이 쓰여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나발은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호로토토라고 불리는 나발과 유사한 악기가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 페르시아지역은 물론 실크로드에서도 발굴되어 현존하고 있다. 고대에서는 특히 야외음악의 중요한 악기로 각광을 받았으며 아랍지역에서는 군대악기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고학적으로 400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나발이 이란과 중앙아시아에서 발굴되었다고하니 나발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일상 생활에서도 나발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남의 덕에 대접 잘 받고 호강하면‘원님덕에나발분다’고 하는데 이때의 나발은 참으로 신명나는 악기이다. 당치도 않은 이야기를 함부로 할 때는‘나발 불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고 타박을 주기도 하고, 술을 병째로 마실 때 ‘병나발 분다’라고 한다. 세간에서 사용되는 나발은 속 된 표현이 많다. 나발은 192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마을에서 이장이 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 신호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오랫동안 우리 생활과 밀접했던 악기에 대한 친밀감의 표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