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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나타나는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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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서도東話西道 - 이겸 2007년 12월 310호
길이 나타나는 순간에 밤의 찬 공기에 실려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온다. 창문을 여니 고양이의 울음소리. 어린 녀석의 울음소리는 잠을 청하지 못하게 할 만큼 처절한 것이었다. 측은지심이들기 시작하여, 나는 아내와 함께 소리를 따라 가기 시작한다. 한 손엔 랜턴을 한 손엔 생선조각을 들고 걸었다.
얼마 후 우린 건물 옥상에 당도했다. 도시에 울려 퍼지는 여린 소리는 너무도 간절했으나, 어둠은 무심히 소리를 삼키고 있다. 아파트 옥상, 난간에 아주 작은 녀석이 웅크리고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마냥 울고만 있었다. 어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녀석의 발 아래로 10층의 낭떠러지가 놓여 있다. 찬 기운이 가득 찬 두려움 속에서 마냥 떨었을 터였다. 지칠 대로 지친 울음소리를 토해낸다. 우선은 녀석을 난간에서 내려놓아야 했다. 하지만 인기척을 느낀 녀석은 우리가 가까이 갈수록 더욱 처절하게 울어댄다. 가지고 간 생선을 내밀어도 소용이 없다. 나는 녀석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을 거리에 당도 했고, 반대로 녀석의 입장에선 급기야 손에 잡힐 거리가 된 것이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미동도 하지 못할 만큼 공포에 질려 있던 어린 녀석은 필사적으로 좁은 난간 위를 뛰기 시작했다. 접혀 있던 용수철이 순간적으로 풀리듯이 튕겨 나갔다. 10층 높이의 낭떠러지 위
에서 달리기 시작했고 탈출했다. 그 짧은 순간이 그 동안의 긴 고통의 시간을 무력화 시킨 것이다. 녀석은 지붕에 다리를 딛는 동시에 어미의 품을 찾아 내달렸고, 드디어 아래층에 있는 집을 찾았다. 어미의 보드랍고 따듯한 품속으로 안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울음조차 낼 수 없고, 도저히 어찌할 수도 없는 더 큰 두려움에 직면하면 기존의 것들은 의미를 잃고 만다. 연기가 공기 중에 흩어지듯 흔적조차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본인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을 때, 본인과 타인의 의지가 전혀 미치지 못하게 되는 상태이다. 이 순간이 바로 바닥이다. 더 이상의 바닥이 없을 때 그러한 상태에 놓일 때 비로소 갈림길이 나타난다. 의지나 생각, 마음이 작용하지 못하는 순간에 어느 길을 가게 된다. 갈림길을 인식하지 못한 채 우린 이미 어떤 길을 걷게 된다. 이것은 훈련된 의지에서 나온 선택이 아니다. 시간을 지내며 체험을 하는 동안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도달한 그 바닥이 생생하게 남게 된다. 나는 이때부터가 공부의 시작이라고 본다. 진리는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난 지금 한 세상 살면서 진리를 갈구하지 않았던 시간들을 돌이킨다.
낭떠러지 난간에서 울고만 있었던 때를 떠올린다. 평소 내가 존경하던 이도, 혹여 나를 증오했던 이도, 나와 피가 섞인 가족도, 막역한 지인도, 그 누구도 이와 같은 상태로 나를 데려다 놓지 못했다. 오직 스스로 어떤 상태에 도달하게 되며, 함께 그 상태에 있을 수도 없다. 참으로 냉정하고 엄연하다. 바람에 촛불이 꺼지듯 한 순간, 초에 빛이 당겨지듯 한 순간이다.

어둠에서 만난 고양이와 내 처지가 참으로 같다. 고양이를 보고 또 한 번 배운다. 생각이 멈출 때, 마음이 없을때, 나는 길 위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길에 대해 탐구探究하게 되었다. 현재 나는 글자에서 찾지 않고, 음성에서 찾지 않는다. 이것들을 보이게 한 그것을 보려 할 뿐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고통은 무엇인가? 보이는 고통보다 보이지 않는 고통이 깊다. 그러나 그 또한 새로운 시작이며, 정면으로 맞서, 보고 또 보고 샅샅이 질리도록 보아야 한다. 또 다시 낭떠러지에 웅크린 채 울지 않기 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