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속에 시작된 순례 첫 날김주연 / 해인사 종무원
해인사에선 지난 11월 2일부터 6일까지 4박 5일간 중국 상해, 소주, 항주 및 보타·낙가산 등의 지역을 돌아보는 중국 불교성지순례의 시간을 가졌었다. 이번 성지순례의 길은 본사와 말사의 여러 스님들과 신도분들 188명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순례길이었음에도, 그 많은 대식구가 별 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가피 덕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를 비롯한 몇몇의 직원들도 이번 순례에 도우미로서 참여할 수 있었는데, 내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다.
성지순례의 길을 떠나기 전엔 며칠 동안 사무실을 비워야 하는지라 일을 정리해놓고 가느라 정신이 없어 여행을 떠난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는데, 막상 출발하는 당일이 되자 드디어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떠난다는 설렘에 나름대로 기분이 들떴다. 성지순례의 길은 워낙에 대규모의 순례단이었는지라, 김해공항에서 출발하는 팀과 대구공항에서 출발하는 두 팀으로 나뉘어서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김해에서 출발하는 팀은 함양, 산청, 진주를 거쳐서 김해공항으로 가야했기 때문에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여야 했지만, 대구팀은 상대적으로 공항까지의 동선이 짧아 여유롭게
출발인원들을 체크하며 출발할 수 있었다.
해인사 큰절에서 출발하는 인원들을 모두 체크하고 드디어 버스가 출발할 땐 정말로 떠나는구나 실감이 났다. 가벼운 흥분 속에 출발한 버스는 1시간 정도 후 드디어 대구 공항에 도착했고, 공항 대기실은 다들 기분 좋은 설렘 속에 속속 도착하는 스님들과 신도분들로 활기 찬 시끌벅적함에 쌓여 있었다. 갖가지 색색깔의 여행트렁크를 화물로 부치고, 면세점에서 값비싼 외제품들을 요리조리 눈요기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드디어 중국 동방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우리 눈 아래 펼쳐져 있는 점점 작아지는 한국땅에 설렘은 더욱 커졌다가, 처음 먹어보는 기내식의 맛없음에 실망하면서 훌쩍 1시간가량의 비행이 끝나고 드디어 상해의 푸동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익숙하게 보아오던 한자가 아닌 간체자로 보는 한자의 어색함 속에서 드디어 중국에 도착했구나 먼저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푸동공항은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처럼 상해시내와 많이 벗어나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도 확장공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어서 조만간에는 인천공항 보다는 더 큰 규모가 될 거라고 했다.
여하튼 푸동공항에 도착한 직후 김해팀과 대구팀이 모두 만났다는 반가움도 잠시, 드디어 1호차에서 6호차까지 각각 관광버스를 나눠 타고 호차별로 움직이는 일정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중국순례여행길이 시작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부터 각 호차의 여행사 가이드와 해인사 직원들은 인원체크의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각 호차의 여행사 가이드 분들은 대부분 연변의 조선족 분들인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다들 우리말이 유창하셨고, 특히나 6호차의 가이드 분이셨던 김 천씨는 이름도 할아버지께서 고향이 우리나라의 김천이라서 그리 지어주셨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사정을 참 잘 알고 계셨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해박한 지식으로 설명을 해주셔서 우리의 순례길을 더욱 더 유익하게 만들어주셨다.
1) 아, 임시정부여!
상해 푸동공항에 도착해서 상해시내까지 약 2시간 가량 이동한 후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상해 임시정부청사였다.
국사교과서에서나 익숙했던 상해 임시정부청사를 드디어 실제로 방문해보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청사는 굉장히 작은 규모라 우리의 대식구가 방문하기에는 벅차보였다. 1층에서 간단한 동영상물을 시청한 후에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 1층부터 3층까지 올라가면서 당시 정부요인들이 사용했던 집기류며 가구, 당시 사용했다던 태극기, 1930년대 중국의 여느 가정집의 주방풍경을 재현해 놓은 모습들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당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사진촬영이 허락되질 않아 눈에만, 가슴에만 담아둘 수밖에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또한 3층에는 독립선언서 등의 여러 기록 자료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또한 시간의 압박 때문에 글 한편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낯선 타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곳 저곳으로 정부청사를 옮겨다니면서도 활동을 멈출 수 없었던 그분들의 투쟁의지를 조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2) 화려한 도심 속 사찰, 옥불사
서둘러 임시정부청사를 떠난 우리 일행들이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옥불사였다. 옥불사는 상해시내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서 우리를 태운 버스는 상해시내를 통과해서 달렸는데 퇴근시간이라서 그런지 거리엔 차도 많았고, 특히 번화가에는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외국의 유명한 상점들이 즐비한 것을 보고 과연 중국인가 싶기도 했다.
여행사 가이드 분의 설명에 따르면 상해의 시내에는 외제차의 전시장이라 할 만큼 외국차들이 즐비하다더니 역시나 심심찮게 수입차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많은 수입차들 중에 대우에서 만든 시내버스를 발견하고는 괜한 애국심의 발로인지 반갑기도 하고, 즐비한 외국상점들 중에서 삼성 애니콜 상점을 발견하고는 또 눈이 번쩍 뜨이곤 했다.
상해는 1842년 남경조약으로 영국에 의해 중국 최초로 개방된 이후 중국의 어떤 도시보다도 서양의 문물을 빨리, 또 쉽게 받아들이는 국제적인 상업도시라더니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 번화한 상해시내의 한복판에 사찰이 위치해 있어서인지 산속에서 자연의 풍광과 조화를 이루며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해인사와는 달리 옥불사는 우리나라의 조계사처럼 도심 속 사찰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옥불사玉佛寺는 청나라 때인 1882년에 지어진 절로서 당시 절강성 보타산의 승려 혜근慧根스님께서 미얀마에 다녀오다 상해에 들러 기부금을 모아 강만진에 절을 짓고 미얀마에서 가져온 다섯 개의 옥불 중 백옥으로 조각된 석가모니 좌상과 와상을 한 개씩 이 절에 모셔 놓아 옥불사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옥불사에는 옥부처님뿐만 아니라 하나의 원목에다 정교하게 불법의 세계를 새겨놓은 나무조각상도 여럿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솜씨가 너무나도 훌륭하여 찬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옥불사에서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돌사자상이나 나무에다 빨간천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점이었다. 우리나라의 점집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신기했는데, 그것이 주술적인 의미인지, 풍속적인 의미인지는 파악해보지 못했지만, 낯선 이국인의 눈에는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또한 중국 사찰은처음 방문해봐서 그런지 중국에선 우리나라처럼 법당에 신을 벗고 들어가 좌복을 깔고 삼배를 하는 문화가 아니라 낮은 나무의자를 옆으로 길게 늘어놓아 만든 좌복에 신을 신은 채 삼배를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좌식문화인 한국과 달리 입식문화라는 중국의 문화적 차이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 오셔서도 열심히 불전에 시주하시고 정성스레 삼배를 하시는 보살님들과 스님들을 뵈면서 신심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구나 웃음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