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졌습니다. 산을 바라봅니다. 어느새 내가 겨울 산 앞에 있습니다.“어떤 이가 한산의 길을 묻네 / 그러나 한산에는 길이 없나니 / 여름에도 얼음은 녹지 않고 / 해는 떠올라도 안개가 자욱하다네 / 나 같으면 어떻게든 갈 수있지만 / 그대 마음내 마음같지 않을걸 / 만일 그대 마음 나와 같다면 / 어느덧 그 산속에 이르리라”
눈치 채셨는지요. ‘ 그러나 한산에는 길이 없나니’ 에서 내 마음이 가늘게 떨렸더랬습니다.
길이 없다면 어떻게 한산에 이를까요. 자유자재한 은자이자 거지 시인인 천태산의 한산자가 낄낄낄 웃습니다.
‘ 뭔 걱정인고? 네 마음이 내 마음 같다면 어느덧 그곳에 이를 텐데! ’라면서요.
보이는 길은 없고 안 보이는 길은 있으니, 길은 마음인 거지요. 산에 이르기 위해 지도가 필요한 것도 안내문이 필요한 것도 아닌 거였습니다. 내게서 산으로 흐르는, 그대에게서 내게로 흐르는 마음이 필요할 뿐. 맺혀서 고립된 마음이 아니라 흐르며 연결되는 마음이 있다면 길 없는 세상이라도 정말로 길이 없는 건 아닌 셈. 문득 단청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겨울의 적막 속에서 산의 모세혈관이랄지 하는 것이 잘 보이는 것처럼, 겨울이 오면 단청이 잘 보입니다. 주위가 화려하고 볼 것이 많을 때 단청은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의 싱그러운 녹음과 화려한 단풍을 다 받들어 공경한 후 겨울에 이르러서야 단청은 참으로 절집을 장엄하기 시작합니다. 꽃, 나무, 풀 등 먼저 스러져 무채색으로 돌아간 것들의 부탁을 받은 것처럼 말이지요.
구체와 추상이 적절히 안배된 단청의 문양은 반복적이면서 손에 손을 잡듯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듯. 그처럼 우리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듯. 단청은 연기緣起의 이치를 리드미컬하게 드러냅니다. 하여 한국 절집의 단청은 퍽 음악적입니다. 생물과 무생물 모두를 포함한 삼라만상이 원색의 생명감으로 단청 속에서 지저귑니다. 독립된 하나의 음만으로 음악이 되지 않듯, 하나의 문양은 다른 문양과 연결되면서 장엄의 역할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단청은 나와 그대가, 바위와 구름이, 여름과 겨울이, 신록과 무서리가, 삶과 죽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나고 죽음 관계를 알고자 하면/ 물과 얼음 비유로 설명하리라/ 물이 얼면 곧 얼음 이루고/ 얼음 녹으면 다시 물이 된다/ 이미 죽었으면 반드시 날 것이요/ 이미 났으면 반드시 죽으리니/ 물과 얼음 서로 해치지 않는 것 처럼/ 남과 죽음 모두 다 아름다워라”
다시 한산자의 시 한 수를 적어 보냅니다. 나고 죽음 모두를 아름답게 장엄하는 단청 아래 겨울 햇살이 어릿 어릿 모이는 것이 보입니다.□
김선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