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좋아서 중학교를 다니다 말고 절집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다니던 서울 돈암동 신흥사에 당시 범패 어산의 일인자로 불리던 운월 스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분에게 소리를 배웠다.
‘봉헌일편향奉獻一片香, 한 조각의 향을 받들어 올립니다.’
부처님 전에 향을 받들어 올릴 때 소리를 짓는 것인데, 그 다섯 글자 안에 범패의 모든 소리가 담겨 있다고 해서 그 다섯 글자만 2, 3개월 동안 배웠다. 총기가 있었는지 들으면 곧 따라했다. 신흥사 바로 밑에 보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비구니스님들이 노스님께 범패를
배웠다. 그런데 그분들이, 노스님이 하면 못 알아 듣겠는데 내가 하면 알아듣겠다고 칭찬해서 더 신이 나서 소리를 배웠던 것 같다. 목을 틔운다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너덧해를 그곳에서공부했다.
옛 것이 좋았다. 낡은 승복도 좋았고 노스님의 범패소리도 좋았고 대궐처럼 웅장한 절도 좋았다. 그리고 소리로 표현되는 게송들이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게송에 대한 뜻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외우면서 게송을 노래하는데 뜻을 확연히 모르겠는 거였다. 노스님들께 여쭈었으나 소리나 배우라는 말씀뿐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소리로 짓는 게송 자체가 부처님 세계를 찬탄하고 예경과 공양을 올리는 내용들로 법계를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 아닌 부처님 세계를 찬탄하는 것으로 엮어져 있어 제대로 이해하면 깨달음이 없을지라도 부처님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그때는 이런 의미를 잘 몰랐으나 어렸을 때 익힌 소리가 지금 경을 보거나 어록을 읽을 때 기쁨의 모티브를 제공해줌을 느낀다. 체력이 좋았으면 계속 소리공부를 해서 어쩌면 큰 소리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체력이 늘 고만고만해 절에 들어앉아 공부하고 경책을 보는 일이 수행으로 자리잡힌것 같다.
게송들의 뜻이 궁금해 한자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통도사 출신의 스님 한 분이 부전으로 오셨다. 그 스님께 통도사에 강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분에게 정보를 얻어〈치문〉을 구입해서 노트에 한 자 한 자 모두 베껴 두고 모르는 한자는 옥편에서찾아 토를 달아 놓았다. 그리고 신이 나서 통도사로 갔다. 스무살이 되던 해였다. 통도사로 갔더니 부모님 승낙서와 건강진단서, 신원보증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서류를
준비해 다음날 행자등록을 하고 짐을 풀었다. 1970년대 후반 당시에 통도사엔 극락암에 경봉스님이 계셨고, 벽안 스님, 경하 스님 등이 주석하시면서 산문을 지키고 계셨다. 나는 곧 후원으로 배치되었다.
열심히 일을 해가면서 틈틈이 공책에 적어간〈치문〉을 보았더니,‘ 저 행자는 벌써 치문을 다 배우고 왔다’고 강원에 소문이 났다. 염불을 제대로 배우고 간 데다가 일도 열심히 해서 그랬는지 당시 노전으로 있던 현문 스님이 원주 소임을 보자 나를 별좌로 지목했다. 별좌는 원주스
님 밑에서 물품관리를 주로 하는 특별 보좌관이다.
행자를 하면서 나의 일차 목표는 통도사 노전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 통도사 노전은 유명했다. 주지스님 바로 밑의 자리로 본사의 모든 공식적인 의식 집전을 노전스님이 할 만큼 중요한 소임이었다. 그만큼 순수한 행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통도사엔 행자나 사미들이 규율을 어겼을 때 경책하던 글을 이렇게 써 놓았다.
‘수구守口 섭의攝意 신막범身莫犯여 시행자如是行者 능득도能得道라.’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입을 잘 지키라, 생각을 거두어 제어할 줄 알라, 몸으로는 함부로 계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이 깊이 마음에 와 닿아서 한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책에‘수구 행자’라고 써넣었다. 항상 마음을 그것에 두고 공부에 힘썼으니, 그 경책의 글을 수행으로 삼았던 것이다.
사실, 신구의身口意삼업만 잘 알면 특별한 마음을 내지 않아도 그것 자체가 수행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을 때, 불자라면‘우리는 신구의 삼업으로 살아가고 있다’라고 대답해야 그것이 정답이다. 그 방법론이 저 경책의 글이다. 글에 담긴 뜻을 정확히 알아야 행할 수 있다. 경전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그 뜻을 충분히 제대로 알면 이해가 깊어지고 이해가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참 수행자라면 알고는 행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모르기 때문에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통도사 행자시절에 마음에 새긴 저 경책의 글귀는 그 뒤로도 나에게‘입으로 어떻게 정법을 펴며,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깨달음을 열며, 몸으론 어떻게 정법을 행하는가’하는 화두로 남았으니 좋은 수행이 된 것이다.
통도사에 간 지 7개월 만인 1978년 하안거 해제날인 음력 7월 15일에 사미계를 받았다. 계를 받기 전 원주였던 현문 스님이 나를 데리고 울산에 계시던 홍법 스님에게로 갔다. 착실히 행자생활을 하는 나를 잘 보았던지 ‘좋은 은사스님을 소개해주겠다’면서 시간을 내서 데리고 갔던 것이다. 월하 스님의 제자로 당시 통도사에서 신망이 두터우셨던 홍법 스님께 승낙을 받고 온 다음 날 연락이 왔다.‘ 행자가 너무 몸이 약해보이니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진을 받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초하루 무렵이어서 일이 바쁜 탓에 미루고 있던 어느 날, 잠시 시간을 내서 영축산에 다녀오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 홍법 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것이었다. 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비켜가고 지금은 내가 있는 절에 걸어둔‘화장찰해華藏刹海’라는 편액 하나만이 당시의 인연을 말해주고 있다. 스님께서 쓰시던 방에 걸려 있던 ‘화장찰해’라는 글이 마음에 들어 나중에 봉선사로 와서 경전을 공부할 때 월운스님께 부탁드려 글을 써 놓았던 것이다.
사미계를 받으면서 청하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주지 소임을 보고 계시던 나의 은사께서는 내가 계를 받고 시봉을 하러 가자 ‘된장찌개 잘 끓이느냐?’고 물으셨다. 생된장에다가 물을 조금 넣고 끓이는 된장찌개를 좋아하셨던 스님께선‘된장찌개 잘 끓이면 홍콩에 데리고가마’하셨는데, 당시 홍콩에 홍법원을 개원하고 해외포교를 하실 만큼 열린 분이었다.
율사로, 조계종 전계사로 계셨던 은사스님께선 종단에서 소문난 효자로 속가의 노모를 극진히 모셨다. 취운암에 계시는 노보살님에게 날마다 한약을 달여 하루 세 번씩 가져다 드리는 일이 시자인 나의 일과 중 하나였다. ‘약은 정성이다. 양을 너무 많지 않게 잘 조절하고 바로드실 수 있게 온도를 잘 맞추어야 한다’라고 일러주시던 은사스님께선 지극한 효자이셨다. 스님은 노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정성 들여 모셨는데, 보온병에 약을 넣고 날마다 10여분 거리에 있던 취운암으로 걸어 올라가던 일이 옛 추억이 된 지 오래다. 은사스님의 효행을 보면서 나도 공부 잘해서 나중에 어머니께 효도해야지 했는데 나의 어머니는 그 날을 기다려주지 않고 서둘러 돌아가셨다. 아들이 수행자가 된 것을 흐뭇해 하면서 말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은사스님에게 배운 효행을 실천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던 것이다. 필요한 책을 메모해서 드리면 외출해서 돌아오시는 길에 책을 사다주시곤 했던 은사스님께는 그 뒤로도 잘 모시고 싶었으나 내가 부족해서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통도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출가사문 된 지 어느덧 30여 년이 흘렀다. 큰 고비 없이 부처님 가르침 속에 젖어들어 경전에 파묻혀 살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출가사문으로서 단호하게 계정혜를 잘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참회이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마음이 발심이다. 출가하려는 사람은 발심참 회가 뚜렷해야 한다. 불자들도 그렇고 출가승도 그것에 대한 덕행이 우선되어야 진정으로 출가 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