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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무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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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정영 2007년 10월 308호
송광사 무애스님 햇살이 나긋나긋해 운동화를 신고 어디로든 떠나고만 싶은 날이다. 송광사 무애스님은 어제쯤 중국포행에서 돌아와 잠시 서울에 머물고 계시다 했다. 며칠 머물다 송광사로 내려갈 것이니 서울에서 만나도 좋겠다는 무애 스님의 도반 스님 말씀에 전화를 드렸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애탄다. 훌쩍 떠나버리실까 염려된다. 그때 무애 스님에게서 나긋나긋한 나뭇잎에 쓴 편지글 같은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극락전 앞 큰 나무 밑서 만나요- 무애’. 얼마간 스님이 머물던 곳, 길상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내가 오늘 포행을 나갈 곳은 바로 그곳, 길상사 극락전 앞 큰나무 밑이다.
“이 차가 조금 떫을거야. 약간 떫은 맛이 있긴 하지만 청병이라서 잎의 향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좋지.”
만나자마자 차를 내어 주시며 하는 얘기다. 중국에서 돌아오는길에 사 들고 오신차를 내주시며 이런저런 차 얘기를 하신다. 차를 즐기시는가 여쭙는다.
“우리가 뭐 있나. 청복淸福이있지.”
술이든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오래하면 뒤끝이 그리 좋은 게 없다. 그러나 차는 마실수록 맑아지니 그것이 복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말씀이다. 도예나 서예처럼, 다도茶道또한 예禮이니까. 그래서인지 오래도록 앉아서 글 공부를 하신 스님인데도 건강하고 날쌔 보인다.
“도심 생활을 하지 않고 송광사에 사니까 그런가 싶네요. 송광사가 워낙에 차분하니까.”
스님은 2004년에 무비 스님께 전강을 받았다. 그리고 송광사에 강주로 있은 지는 2년 여. 총림 중에서도 크지 않고 워낙에 기운이 들뜨지 않고 가라앉아 있는 곳이어서 스님은 그 기운에 건강한 게 아닌가 말씀하신다. 송광사 큰방에선 여름에 선풍기도 틀지 않는단다. 분지여서 습도도 높은데 수행자로서 자연 그대로 있겠다하니 다른 스님들은 산철도 못 견디고 나가곤 하는 곳이다. 그런데 스님은 그런 송광사에 머물고 있는 것이 편안하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시현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여 계를 받고 바로 송광사 치문반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졸업은 88년에 통도사에서 했다. 삼보사찰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것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그리고 93년에 해인사에서 강사를 하다가 출가한 지 십년쯤 되던 해인 97년 봄에 돌연 중국으로 떠났다.
거기서 1년여를 공부하고 다시 대만으로 떠나 불학연구소에서 2002년 가을까지 머물며 공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일본에 가서 공부하다가 2003년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돌아와 동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준비했다. 평생을 공부로 떠돈 인생이다.
“어차피 한문 경전이 주류이니, 경학을 하려고 한다면 중국권에 다녀오는 것이 좋다고 봐요. 중 노릇을 삼사십년하는데 이삼년 다녀오는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역경원 원장인 월운 스님도 경전에 대해 말씀하시며‘아무리 봐도 남의 글’이라 하셨다. 어찌할 수 없는 벽’이 있다고 느끼셨다. 그렇다면, 그 벽을 넘기 위해서는 그 글을 쓰는 현지에 가서 공부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지금 중국어를 백화체白話體라고 하잖아요. 조사스님들의 어록은 대부분 그 당시의 백화체로 쓰여 있어요. 그러니까 현재의 백화체를 익혀놓으면 그 당시의 백화체를 보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는 거죠. 백화체를 내 글 보듯이 본다면 고전을 보는 것도 쉬워지는 거죠.”

그토록 불교에 대한 자료가 많은 일본에서 공부할 때도 느낀 것이다. 일본 사람들도 중국권에 가서 공부하려는 의지와 희망이 강했다. 박사과정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하는 과목이 고전 원전 훈독 방법이었으니, 그만큼 우리와 일본은 원전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이다.
스님은 내내 어디를 떠돌며 어떤 공부를 하셨는지, 공부 이야기를 내내 하시니 여쭙는다. 공부가 그리 좋으신가.
“아직 익숙지 않은 것은 낯설게 하고 낯선 것은 익숙하게 하라 했어요. 생면부지의 사람과 마주앉아 있으면 그것이 잠깐이어도 불편하겠지만 오래도록 만나 온 사람과 같이 있으면 그것이 어렵지 않죠.”
생면부지의 공부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불교학자라면 불교학을 하는 데 있어 목표나 의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 그것은 스님들의 산중 공부와는 전혀 딴 세상의 것. 바로 수행과 연결되는 스님들의 공부는 번뇌를 식혀주는 힘이 있다. 그러니 스님들은 공부를 할수록 청량하고 시원해진다는 말씀이다.
“조사 어록 같은 것은 당하當下, 그 자리에서 번뇌가 혹업고惑業苦로 가는 것을 끊어준다고요.”
그러니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차 맑아진다는 말씀, 어려운 만큼 그것을 해 놓으면 해 놓을수록 점차 쉬워진다는 말씀이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편히 발 뻗고 잘 수가 없으니 해결하자는 말씀이다. 팔십 근의 짐을 지고 있는데, 잠시 내리막길로 가니 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고 해서 짐이 덜어진 것도 아니며, 설사 그걸 옆에 잠깐 내려놨다고 해서 그 짐이 완전히 내려진 것이 아니니, 끝까지 가야 완전히 내려지는 것이니 금생今生동안 혹은 몇 겁에 걸쳐 지고 다니던 것을 내려놓은 것 같은 홀가분함을 느끼기 위해서, 지금 열심히 가고 있다는 말씀이다.
“사바 세계 사람들이 생각하면, 그것이 절망일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추동력이 될 수도 있어요.”
갑갑한 상태가 좋은 공부의 시작이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해서 밀고 가다보면 기연機緣에, 차를 마시다가도 마당을 쓸다가도 짐이 내려질 날이 올 것이니.

스님이 출가한 것은 86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마치고 졸업식도 하지 않은 채였다. 식품공학을 전공하며 차茶연구도 하고 직접차를 만들어 보기도 했으나 스님은 전공보다는 한국사회학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때 주간조선에 나온 불교 관련 글을 보는데 도대체가 알아듣질 못하겠더라고요. 철학이니 인문학이니 그래도 공부를 좀 했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있었는데,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모르겠더라고. 정말 어렵네싶었지요.”
그때부터 경봉 스님이나 성철 스님의 어록을 읽었다. 시원한 느낌이 들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실제 수행적인 얘기이니 밖에서 공부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서 출가를 결심했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직장이나 결혼에 대한 꿈이 없었다. 결혼을 해서 아내와 아이가 있는 상이 그려지지도 않았다. 어떨 때는 집이 직장 같고 직장이 집 같으니 출가해야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런 것들이 다 출가와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무리 뒤 돌아봐도 거리낄게 전혀 없다. 그러니 무애無碍스님이 아닐 것인가.
“해인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고 수계를 받으려니 호적등본 같은 서류들이 필요해서 집에 전화를 하려는데 우리집 전화번호가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절이 우리집 같은 거지. 저기가 남의 집이고.”
처음 해인사에 들어가니 규율반장 스님이“행자님, 삼일짜리구만!”그랬다. 그러나 절이야말로 내 집 같아서 바깥세상 생각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마치 전생에도 절에서 살았었다는 듯이. 그러니 선근善根이랄 수밖에. 지금도 다른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는다. 다른 모든것, 어떠한 공부도 무상할 뿐이다.
“다른 공부는 정신적인 부분을 고양시킬지는 몰라도 그것이 생사生死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니까.”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삼매상태를 투과를 해야 하는데, 사회철학이나 인문학은 삼매 상태를 투과하게 하진 않으니 모두 무상할 뿐인 것이다.
스님의 화두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일귀하처一歸何處.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것. 물론, 화두가 성성해서 수좌들처럼 하루 온종일 화두를 들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스님은 지금 생활에서 화두를 드는 수행법이 생활을 정리하게 해주고 가라앉혀 주니좋다.
“현대일수록 염불을 하든 화두를 들든 수행법이 하나씩 있어 삼매로 가야해요. 아니면 더 혼탁한 세상이 되고 말아요. 2비트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이니 명언종자名言種子의 세상이라고요. 과학이 발달할수록, 명언종자가 많아질수록 번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어요. 그러니 그걸 가라앉히려면 무념으로 가야 하는 거지.”
전문적으로 수행을 안하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하나 정해 하루의 복잡함을 가라앉힐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는 말씀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2500년 전의 구닥다리 방법이 현대의 복잡다단한 것들을 일시에 깬다.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스님은 지금껏 해왔듯이 늘 공부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칠 생각이다. 그러다가 또 연이 닿으면, 우리나라에 중국과 대만 쪽의 불교가 거의 소개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서 번역 작업을 통해 꾸준히 그쪽 불교를 더 알릴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 스님들이 저술한 것을 집대성한 한국불교전서가 완간이 아니어서 그 못다 한 것들을 더 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스님은 자리를 털며 말씀하신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구나- 하는 노래 있지요? 날 찾아온다고 하니 그 노래가 생각 나더라고요.”
허허 웃으시는 그 모습이 참 바보 같다. 이 사바세계 사람들이 스님만큼만 그렇게 다 바보 같으면 좋겠구나싶다. 나긋나긋 하던 오후 햇살도 바보처럼 나직나직 웃으며 산마루를 넘는 시간, 스님은 또 그렇게 허허, 바보처럼 웃으며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