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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구절골 토굴의 그 수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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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석종 2007년 10월 308호
<마을의 아주머니들이 수군댔다. 스스로 계를 깨뜨릴 만큼 공부가 안 된 스님은 아니라고 했다. 폐결핵 환자였던 여인이 스님의 법력으로 병이 나았다고 했다. 여인은 스님에게 그냥 떠날 수는 없다고 간청하고 애원하며 매달렸다고 했다. 스님이 도리질을 쳤으나 여인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이 차가 20년이라고 했다.
그래서 얻은 딸은 팔이 짝짝이라는 헛말도 돌았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계룡산과 마주한 장군산에 구절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었다. 오랜 옛날 아홉 곳의 절이 있었으나 빈대가 들끓어 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지금‘행복도시’라는 신행정수도가 들어서고 있는 공주 장기지구. 바로 내 고향 어름이다.

1960년대 말이었을 것이다. 바랑 하나 걸머진 한 스님이 동학사 쪽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금강을 건넜다. 키가 크고 용모 준수했던, 눈빛마저 형형한 그 스님은 표표한 걸음으로 장군산 구절골로 향했다.

구절골은 맑은 물이 흐르는 좁은 골짜기를 지나 가파른 고개를 한참이나 더 올라가야 하는 외진 곳이었다. 스님은 아버지와 친분이 있어 몇 차례 우리 집을 다녀갔다. 그는 구절골 한복판 양광 터에 황토벽 바른 아담한 초가 한 채를 지었다. 집 짓는 일을 누가 거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뒤따라 곱고 가녀린, 얼굴 창백한 여인이 어린 딸을 데리고 들어왔다.

마을의 아주머니들이 수군댔다. 스스로 계를 깨뜨릴 만큼 공부가 안 된 스님은 아니라고 했다. 폐결핵 환자였던 여인이 스님의 법력으로 병이 나았다고 했다. 여인은 스님에게 그냥 떠날 수는 없다고 간청하고 애원하며 매달렸다고 했다. 스님이 도리질을 쳤으나 여인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이 차가 20년이라고 했다. 그래서 얻은 딸은 팔이 짝짝이라는 헛말도 돌았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가 처음으로 스님을 만난 것은 열 살이 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나는 현판도, 일주문도 없던 초가삼칸의 그 `절을 좋아하게 됐다. 나는 누나를 졸라 10리 길을 걸어서 구절골을 찾아가곤 했다. 어머니는 늘 공양미를 손에 들려줬다. 갈때마다 스님은 밭을 일구고 있었다. 그 땅은 척박했다. 주변은 온통 너덜지대였다. 스님은 톱으로 상수리나무와 소나무 같은 것들을 베어내고 칡넝쿨을 걷어냈다. 작은 돌은 캐내고 바위는 해머와 정으로 깨뜨려서 끌어냈다.
깨뜨린 돌을 축대처럼 쌓아올리고 그 안에 지게로 흙을 져다 쏟아 부었다. 밭 위로 삐져나온 바위는 하나도 없었다. 구절골 비탈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밭이 생겨났다. 층층으로 만들어진 밭은 물만 있으면 벼농사를 지어도 될 만큼 반듯반듯했다. 밭에는 주로 콩과 깨를 심었다. 고추, 배추, 오이, 상추 따위 푸성귀도 가꿨다. 감자, 고구마도 갈았다.
밭 한가운데로 납작한 돌을 놓아 구불구불 제법 운치있는 돌계단 보행로를 만들었다. 곳곳에 정원석 같은 것들도 세워 멋을 부렸다. 단풍나무, 잘생긴소나무, 산감나무, 산벚나무들은 베지않고 남겨두기도 했다.

절 안팎은 참으로 깔끔하고 정갈했다. 돌계단 오솔길은 늘 싸리비로 쓸어서 가을에도 낙엽 몇장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 마당에는 철따라 예쁜 꽃들이 피어났다. 그런일들이 스님 아내의 몫이었다. 언제나 없는 듯 조용하고 조신했던 그녀는 분홍빛 참나리 꽃과 모란과 해바라기를 심고 또 심었다.

가족은 모두 승복 차림이었다. 아내와 딸은 머리를 삼단같이 길렀다. 꽃밭에서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달려오던 승복 입은 꼬마 아가씨 지현이. 하루 종일 절 마당에서 서성댈 뿐 말썽 한 번 피우지 않는 아이였다. 나는 지현이를 무등 태워 산꼭대기에 오르거나, 진달래 꽃밭을 헤매거나, 버찌를 따러 다녔다. 새들은 숲속에서 푸드덕 거리고 짹짹댔다.

언제나 스님의 이마에 맺혀 있던 그 땀방울. 일할 때 스님의 표정은 무심하면서도 자못 오연했던 것 같다. 누가 찾아오면 합장한 채 슬쩍 미소만 지을 뿐, 말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스님의 적막을 깨지 않으려는 듯 모녀도 조용조용 대화를 했다. 참 아늑한 그림이었다. 나는 그들의 살이에서 세간의 행복과는 질이 다른 어떤 경건한 아름다움을 보았던 듯도 싶다.
정淨하고 정할뿐, 탁濁 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던 그이들.

납작하니 엎드린 초가 뒤에는 북창굴이라는 제법 깊고 넓은 바위 동굴이 있었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스님이 동굴 입구에 돌을 쌓았다. 스님은 안으로 들어가 입구를 막아버렸다. 스님의 아내가 때 맞춰 구멍을 통해 공양을 들여 놓는다고 했다.

스님은 동굴에서 나온 뒤 비로소 묵언을 풀었다. 얼마 뒤 내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아버지
는 마을에서 스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독경을 했다. 아
버지의 49재를 그 절에서 모신 다음, 내가 절을 찾아가는 일도 뜸해 졌다.

스님은 구절골에서 10년쯤 살았던 것 같다. 어느 날 스님과 모녀가 홀연히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절의 기물이며, 살림살이를 어떻게 옮겼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예쁜 소녀로 자라난 지현이와 작별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섭섭했다.

마을의 아주머니들이 또 수군댔다. 구절골이 공유지여서 무단 점유와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잡혀갔다고 했다. 연락을 받은 큰절 스님들이 와서 엄마와 딸을 데려갔다고 했다. 스님의 부탁으로 한밤중 아주 조용히 짐을 실어냈다는 것이다. 지현이는 동학사에서 머리를 깎았고, 엄마는 친정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엄마 역시 비구니가 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어쨌든 그 후 스님과 모녀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빈 집은 그해 폭우에 무너졌고 북창굴은 금방 폐허로 돌아갔다. 그렇게 공들여 일군 밭에는 어느새 칡넝쿨만 무성했다. 돌계단 오솔길은 수북한 낙엽에 묻혀버렸다. 그들이 떠난 빈 절을 보고 돌아온 날, 괜스레 눈이 아리고 금강 서쪽으로 떨어지는 석양은 더욱 붉었다.
그 스님, 얼마나 벼랑이었을까. 짊어지고야 만 업고와 번뇌의 바위덩어리를 깨뜨리기 위해 치열하게 마음밭을 일구던 구절골 스님. 나는 세상살이 어렵고 가슴 시릴 때마다 산문山門을 서성이며 끝내 법명조차 알아두지 못한 그 스님을 떠올린다. 몇몇 스님네들의 삿됨으로 온 사문沙門이 구설에 오를 때도, 나는 스님의 두문과 불출과 묵언을 생각한다. 북창굴 스님을 찾아다니던 어린날의 내가 몹시도 그립다. 벌써 40년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