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증은따로잘건사하세요!” 2박3일 내금강 일정 중 본격 일정이라고 할 수 있는 둘째날, 내금강에 내리 퍼붓는 그 신랄한 빗줄기는 외금강에 견주어 됨새가 수월하리라 여겼던 안이한 입산자를 꾸짖는 호된 고함질이었다.‘ 불구심해不求甚解, 산을 보되 그림을 보듯이 그저 즐길 뿐이지 깊이 이해하려고 따져 보지 말라는 옛사람의 말씀이 없지 않았기로 그러자 마음 먹고 떠난 길이기는 했으나, 무슨 어깃장이셨을까. 이생에서 다시 못 올지도 모를 금강산은 빗줄기 뒤로 몸을 숨기신 채 그렇게 깜깜하게 돌아앉아 계시더니, 다음날 일정이 끝나는 마지막 날은 눈부시게 쾌청했다. 아무래도 전날 산행으로 무릎이 까탈을 부릴 듯하여, 구룡연 폭포를 오르는 대신에 신계사에 뒤처져 머물기로 했다. 아니, 경주 흥륜사의 혜해慧海노스님이 그곳에서 통일 발원 기도중이시란 것을 알고는 망설임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목적지로 여행객을 실어나를 차들이 대기하는 온정리 주차장에서 신계사까지는 지척이었다. 그 햇빛 속으로 드러난 웅혼한 집선봉集仙峰은 골기가 성성했다. 전날에 우중을 무릅쓰고 다녀온 금강산은 객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시지 않더니, 그 산을 벗어나 평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내 보이신 가감 없는 실상이었다. 신계사는 집선봉을 마주 대하면서 좌우로 문필봉과 세존봉 따위를 거느리고 앉은 평지 가람으로서, 금강산의 관문이라 할 만한 곳이다. 도량이 앉은 곳은 겨울이 여름보다 낮 시간이 더 길다는 절묘한 지세라 했다. 그 지세에 걸맞게, 앞으로는 남녘과 북녘의 불자들이 애써 가꾸어 가야 할 통일 불사의 양명한 보금자리로 자리매김 되고야 말 터였다.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이후 발효된 남북공동선언이 계기가 되어 진행된 남북한 불자들의 통일 불사 발원은 그간의 갖가지 정치 현실적 장애 요소에도 불구하고, 2004년11월의 대웅보전의 낙성식으로 가시화되었다 할만하다. 남북한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뒤로, 돌탑과 돌기둥 몇개 만남아 있던 도량에는 이미 열 채가 넘는 당우가 두렷이 들어섰고, 이어서 두 번째 요사채, 수각, 해우소 따위의 부속물이 시설될 것이라고 하니 가람은 곧 육이오전쟁이전의 모습으로 말끔히 복원될 터였다. 그뿐인가, 300관 대종이 아직은 비어있는 종각을 채울것이고, 한분만 조성되어 있는 불상대신에 삼존불이 모셔질 것이라하고, 이곳과 인연이 깊은 석정스님이 제작하고 있는 후불탱화도 봉안될 예정이라했다.
오는 10월 13일, 5년 동안 지속되었던 복원 불사의 회향일을 앞두고, 한창 막바지 불사가 진행 중인 신계사 도량은 다소 어수선했다. 조계종단에서 도감 소임을 임명받고 북녘 땅 최초의 상주常住수행자로서 복원 불사를 지휘하고 있는 제정 스님의 재바른 움직임 너머로, 무리지어 한담을 나누다가 떠들썩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검은색 옷을 입은 장정들도 보였다. 불사에 동원된 북녘 인력들이라 했다. 선뜻 도량 안으로 발길을 들여 놓기가 조심스러웠다. 어떤 시간과 어떤 공간인가. 화엄경에서 이르는 대로 법기 보살이 상주하고 있다는 금강산의 관문이다. 얼마나 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을 거쳐갔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 단호한 발자국을 찍었을 것인가. 대웅보전에 들어 예를 올리기 전에, 법당 앞에서 있는 석탑앞에서 오래 서성대다가 때가 되었던지, 강한 꽃향기와 함께 잎보다 연한씨를 사방에 풍기고 있는 보리수나무아래에서도 오래 머물렀다. 절 옆 온정리 쪽으로 펼쳐지는 숲에는 이곳에서는 미인송으로 불린다는 적송이 장하게 자라고 있었다. 눈이 많은 금강산의 미인송에는 잔가지가 없다. 쌓인 눈의 무게로 지엽은 쳐버리고 오롯한 본 줄기로만 서 있다.
법당에서 예불을 모시고 있던 혜해 스님이 어간문 밖으로 나오셨다. 상좌 스님 한 분과 백팔배까지 마친 뒤인데도, 구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이 가볍다.“ 스님, 차 한 잔만 주십시오.”입구인 만세루 왼쪽에 뚜렷하게 지어진 요사채의 어느 방 하나를 처소로 삼고 계시겠거니 짐작했는데, 안내를 받고 객이 이끌린 곳은 따가운 여름 햇살로 달궈지기 시작한 컨테이너 집이었다. 방 안에는 제정 스님이 개스를 아끼려고 푸나무를 때어 찻물을 덥히곤 한다는 난로가 한 대 있었다. 현대 아산 직원 숙소에 방 한 칸을 배려 받아 처소로 삼고 있다하셨다. 텔레비전과 에어콘 따위가 있다고는 하나 그곳 또한 컨테이너 구조물이다. 그곳에서 잠을 자고, 날마다 아침8시쯤에 이곳으로 이동해와서 저녁 6시에 다시 절에서 철수해야 한다.
건강을 여쭙는 객에게 아직은 견딜만 하다고 답하시는 노스님의 얼굴이 각시탈과도 같은 미소가 떠오르며 환해졌지만 객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스님은 이 오죽잖은 컨테이너 집에서 손수 마지를 지어 부처님께 올리고, 그리고 목탁과 죽비로써 단촐한 예불을 올린다. 부전 소임은 온전히 스님의 몫이다. 예불은‘규칙’에 따라 하루에 한 번 밖에 올릴 수가 없다.“ 이곳에서 철야 정진을 못하는 것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불만은 없어요. 신계사 불사가 회향이 되고 난 뒤에도 왕래만 자유롭기만 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요.”
2004년 남북 합동으로 치러진 대웅보전 낙성식에 참예한 뒤로, 스님은 현대 아산과 종단의 배려로 이곳에 수시로 와서 머물며 기도하신다. 이곳 신계사는 올해 세속 나이로 여든 여섯이 되시는 스님의 출가 본사이다. 구도의 길을 걷기로 작정함으로써 새 몸을 받으신 스님이 이곳에서 몸을 벗게 해줍시사는 것이 평생의 원이었던 만큼, 한 해에 절반 이상을 이곳에 와 머물며 기도하시는 혜해 스님은 머무름 그 자체로 남북이 함께 품고 있는 통일 염원의 상징이 될 수 있을 터였다.“ 뭐 별로 하는 일은 없어요. 마지 올리고, 예불 드리고, 법당소제하고, 포행하고…”당신이 짓고 있는 기도란 것이 뭐 대단한 것일까 보냐는듯, 스님의 얼굴이 또 한번 파안이 되었다.
평안북도 정주군 안흥면 안의동이 속향이었던 스님이 금강산을 향해 발걸음을 뗀 것이 1944년이었다. 가혹한 일제의 압제를 벗어나려면 도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소박한 믿음 한 가지만 품은 채로였다. 스물네살먹은 처자 몸으로 원산을 거쳐 찾아온 곳, 신계사는 육이오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당시만 해도 열 채가 넘는 전각과 당우가 있었고, 현재 법당 앞에 서 있는 보리수가 그때에도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더라 했다. 큰 절에서 오리쯤 떨어진 곳, 신계사 산내 비구니 스님의 수행 도량인 법기암에서 대은 스님을 은사로 축발을 했다. 그 때에 법기암 뒤에서는 일종식을 위한 식구食口만 내놓은 토굴에서 효봉 스님이 정진 중이었는데, 효봉을 위해 공양을 지어 올리던 스님이 그의 은사인 대은스님이었다.
산중의 생활은 단조롭고도 일정했다. 예경하고, 기도하고, 나무하고 불 때어 공양을 지었다. 비구 스님들도 징용을 피할 수 없었던 가파른 시절이었으니, 산중의 비구니스님도‘보국대’노릇을 피할 수가 없었다. 산중의 일상사에 솔갱이 따기, 마소용 꼴 베기, 노끈 삼기 일 따위가 고단하게 보태졌었다. 해방을 맞은 이듬해에 남쪽으로 내려오기 전, 법기암에 이어 유점사에서도 한 해쯤 머물렀다.“ 그 때에 유점사에는 태고종 종정을 지냈던 덕암 스님, 부전 사시던 경산 스님, 그리고 노전 소임 보시던 보봉 스님이 계셨는데, 모두 장좌 공부 중이었어요. 식량을안주니어째. 더 이상 절에 머물 수가 없어서 남쪽으로 내려왔지요.”
이후로 혜해 스님은 제방 선원을 찾아 좌복 위에 앉았다. 해인사 국일암, 윤필암, 양진암 등에서 효봉, 성철, 청담, 향곡, 구산, 자운 스님들에게 선도리를 여쭙는 일, 60년 세월 동안 한 번도 안거를 결한 적이 없더라 했다. 그 발걸음은 이차돈이 순교를 했다고 전해지는 경주 흥륜사에서 멈추었다. 그곳에서 선방을 개원하고 후 학들을 제접하며 오늘에 이른 삶, 올해도 스무 명 남짓 방부를 들이고 정진 중이라 한다.“ 진작에 선방으로 돌아가서 반살림에나마 참여하고 싶었는데, 이젠 해제 때나 맞추겠네요.”그이가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머물게 하는 기도의 제목은 무엇일까.“ 정치가 종교도 도덕도 앗아가 버리는 것이 늘 아쉽지요. 통일이 되면 그 사정은 좀더 눅어지겠지요.”그렇게 눙치신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스님은 한순간도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낮추는 법도 없었지만 한결같이 양명했다. 문득 스님의 손에 객의 눈길이 머물었다. 왼쪽 중지가 다른 손가락보다 두어 마디가 짧다. 오척 단신, 의자에 얹어놓고 계신 당신의 몸 아래로 가 꿇듯이 앉는다. 그리고 여쭈었다. 부처님께 소신 공양을 올리신 거냐고. 스님은 공양은 무슨, 하고 말을 자르신다. 그러고는 그 짧은 손가락에 대해서는 더 말씀이 없으셨다.
도량으로 다시 나와 스님을 신계사 법당 앞 석탑앞으로 모신다. 스님과 천년 세월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석탑을 온전히 다 담아보려고 기단석 위로 올라서 보시라 했더니, 탑을 밟아서는 안 될 일이니 그리 할 수는 없다고 자르듯 말씀하신다. 카메라 대신, 돌이라기보다 이미 흙의 뜻에 더 가까워진 팔부신중의 이미지를 눈 속에 담는다. 석탑앞, 내리쬐는 정오의 햇살로 눈이 더 가늘어진 스님모습이 그 위로 겹쳐진다. 똑같다, 똑같다!
구룡연에서 일행을 태우고 온 정리로 돌아오는 버스가 곧 절앞으로 도착할 시간이다. 신계사를등지고 급히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되돌아보니, 혜해 스님이 비를 들고 법당 앞 계단 위에 서 계시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묻혀 올린 모래를 쓸어내는데, 법당 소제를 끝낸 상좌 님이 그 비를 뺏아드는 것이 얼핏 보인다. 절은 한여름 햇살 속에서 더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