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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조민숙 2007년 9월 307호
작은배려 “흰 고무신 신고가거라!”
엄마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머리에 쌀자루를 이고 집을 나섰다. 30분을 걷고, 완행버스를 타고, 직행버스로 1시간을 달려, 다시 시내버스에 탔다. 그야말로 집도 많고 차도 많고 사람도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예의상 흰 고무신에 치마까지 입었는데. 별로 기분
좋지 않지만 상관없다. 혼자서 머나먼 길을 한글만 믿고 찾아오는데 성공했으니! 강둑이 넘칠 듯 흘러내리는 남강의 위용을 넋이 나간듯 바라보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혼자서 잘 찾아 왔다고 좋아하시는데 종손의 표정이 심드렁하다. 촌티 나는 동생이 싫은 모습이다. 받을 줄만
아는 종손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덕분에 할머니께서 운동화를 사 주셨고, 진주 구경을 실컷 했으니 밑지는 나들이는 아니었다. 버스 속 낯선 사람들의 표정과 오빠의 심드렁한 표정이 겹쳐지고, 흰 고무신이 떠오르면 어린 시절의 객기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흰 고무신은 그나마 사치였고, 친구들 중 몇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식모살이를 떠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몇은 부산에 있는 섬유공장, 신발공장의 공원으로 갔다. 대형버스에 실려 공장으로 향하는 친구들을 보며 가슴 아팠다. 그들은 명절에 가족들의 선물을 한 아름씩 들고 왔다. 일터로 돌아가는 날엔 떠나는 자도 남는 자도 안타까워 눈시울만 붉혔다. 열세 살 안팎의 그들을 보며 가슴이 미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당당했다. 몇년 전 <토지>를 읽으며 그 친구들을 생각했다.
600여 명의 인물들이 나타나 사투리까지 실감나게 뱉어내며 힘든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펼치는 다양한 삶의 여정이 안타깝고 갑갑하여 읽기를 그만둔 적이 여러 번이었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역경을 견디며 나아가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 위로 받기도 하였다.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친구들, 이웃, 심지어 나까지 토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 많은 인물들을 책속에 살려낸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았고, 모든 생명체의 역할을 존중했기에 가능 하였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현실 세계로 나온‘최 참판댁’과 등장인물들의 초가집을 거닐다가 물었다.
“너희에게 최 참판댁의 하인으로 살겠느냐, 평민으로 살겠느냐 묻는다면?”
“….”
아이들의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
하인과 평민으로 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씌워지는 삶의 무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고, 가지고 싶어도 가지지 못하고,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고,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인간의 삶을 이
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가상의 공간이 더 자연스럽다. 밖에서 실컷 놀고도 가상세계의 놀이를 하지 않으면 놀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자연에서의 여가도 어려운 공부로 생각한다. 가상 세계에서 성을 만들고, 무기를 사고 팔고, 하녀를 사는 등의 사이버 활동만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다 생각한다. 그들의 가상공간에서는 감정이 작용하지 않는다. ‘가슴 저민다’는 단어는‘아깝다’는 단어로 통할 수 있다.
1996년‘정보화촉진기본계획’이란 것을 발표하며,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정보를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삶의 질이 향상되고 빈부격차가 줄어들 것이라고 하였다. 미래학자들도 정보화 사회는 우리에게‘장밋빛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라 하였다.
이후 10여 년이 지났으나 아쉽게도 원하던 장밋빛 미래를 맞이하지는 못하였다. 넓어진 가상공간에 난무하는 쓰레기 정보를 처리하느라 힘겨워하고 있다. 50세 이상의 연령층은 새로운 기기에 적응하지 못하여 소외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을 것이라 했는데, 사이버 군중들에게 찍히면 개인의 모든 정보가 인터넷에 나뒹굴며 손가락질 당한다. 다양한 의견이 모아
지기 보다는 평균적 의견만이 살아남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인의 자살률은 OECD국가 중 가장 높다는 소식도 몇 년째 듣고 있다.
대학까지 졸업한 젊은이들의 월 평균 임금이 88만원이라고 하여 그들을 88만원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도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었는데, 대학까지 졸업하고도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한다. 그러함에도 대학진학률은 80%에 이른다. 모두 선택의 여지도 없이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비슷하기에 비슷한 일자리를 구하려한다. 경쟁은 치열한데 인재가 부족하다고한다.
‘다르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너와 내가 다르니 내가 돋보이고 네가 돋보일 것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네가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너와 나에겐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로거슬러 올라가는 역사가 있다. 그 역사는 하찮아 보여도 뭇 생명들과 인연 지으며 살아온 인고의 세월이 깃들어 있다. 그들의 아픈 역사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나아가 사회를 아름답게 할 것이다.
토플러는 지식혁명이 국가, 인종, 지역, 문화의 경계를 허물고 그 범위를 전 지구로 확장하고 있으며, 우주까지 범위를 넓혀 가고 있으니 경계를 허물고 편견을 버리라고 한다.
해인사 다녀온 이후로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졌다. 7년 동안 유지해 온 운전습관을 버리고 건널목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팔에 용 문신을 잔뜩 그린 젊은 남성이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작은 배려는 이웃을 즐겁게 하고 큰 배려는 사회를 풍요롭고 아름답게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측은지심惻隱之心 대자대비大慈大悲 세 마디면 끝날 글을 부처님의 은공으로 많이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