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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어떻게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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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조계종정 해인총림 방장 법전 스 2007년 9월 307호
하안거 용맹정진을 마치고 수혜불세수水兮不洗水하고
금혜불역금金兮不易金이로다
매모색득마昧毛色得馬하고
미사현낙금靡絲絃樂琴이로다
물로는물을씻지못하고
금으로는금을바꾸지못한다.
털빛을모르고도준마를얻었고
줄을없애고도거문고를즐긴다.

법안문익法眼文益선사에게각覺상좌上佐가찾아왔습니다.
“배로왔는가? 걸어왔는가?”
“배로왔습니다.”
“배는어디에있는가?”
“배는강에있습니다.”
그리고는 물러가자 선사께서는 곁에 있던 납자에게 물었습니다.
“각 상좌가 제대로 안목을 갖추었느냐? 갖추지 못했느냐? 네가 말해보거라.”

오늘은 하안거 한철 살림살이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해젯날입니다.
이제 자동차 혹은 기차를 타고 또 배나 비행기를 이용해 해제대중들은 만행길에 나설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산길을 걸어서 선지식을 참방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 화두의 주인공인 법안문익 선사는 장경혜릉長慶慧稜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나한계침羅漢桂琛 선사의 법을 이어 받았습니다.
장경혜릉과 나한계침은 모두 설봉의존 선사의 제자입니다.
따라서 법안 역시 설봉 가풍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법문은 문익 역시 설봉의 영향 아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설봉의존 선사가 어떤 납자에게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왔는가?”
“복선覆船 회상에서 왔습니다.”
복覆은 엎어진다는 말이요, 선船은 배를 가리킵니다.
그 납자는 설봉선사가 온 곳을 묻자 정말 떠나오기 전에 자기가 살았던 곳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가만히 있을 선지식이 아닙니다.
“생사의 바다도 건너지 못했는데 어째서 벌써 배를 엎어버렸는가?”
이말에 그만 그 납자는 말문이 콱 막혀버렸습니다.
멍청하게 다니면 가는 곳마다 곳곳에 있는 생채기에 걸려서 자빠질 일 뿐입니다.

해제는 그냥 해제가 아닙니다.
결제 동안 공부했던것을 해제 때에는 제방의 선지식과 도반을 두루 참방하면서 자기의 공부를 더욱 탁마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걸어서 왔는지 배를 타고 왔는지를 묻는 물음에 대하여 낙처落處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순간 몽둥이 삼십방 아니면 귀가 멀어질 만큼의 꾸중하는 고함 소리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서주舒州의 해회제거海會濟擧 선사가 낭야혜각 선사에게 갔습니다.
혜각선사가 물었습니다.
“납자는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인가?”
“절강浙江에서 옵니다.”
“배로 왔는가? 걸어서 왔는가?”
“배로 왔습니다.”
“배는 어디에 있는가?”
“강에 있습니다.” 그러자 혜각이 다시 물었습니다.
“길을 거치지 않는 한 구절은 어떻게 말하려고 하는가?”

선지식의 물음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하는 수단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질문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공부길을 묻는 것임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그 선지식은 속복의 거사차림일 수도 있고 재가 보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선지식은 외형으로 알아볼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암두전활선사가 회창법난을 만나 속복차림으로 한양 악저호에서 뱃사공 노릇을 할 때, 양쪽 강변에 목판을 하나씩 세워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을 건너려는자는 이 목판을 쳐라.”
보통 사람들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그냥 그렇게 하라는 말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공부인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강은 생사生死의 강입니다.
생사의 강을 건너려고하는 자가 있다면 안목이 제대로 열렸는지, 내가 직접 점검해 보겠다는 말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해제 후 만행을 하게 되면 어딜가나 눈밝은 사람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알아보는 안목이 있을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속복 입은 암두선사를 그 형색으로 만선지식인 줄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은 제대로 된 문답이 오고 간 연후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배 위에서 만난 노파가 암두에게‘제대로 된 한마디’를 요구했으나, 암두마저도 우물쭈물 둘러대자 그 노파는 사정없이 업고 있던 어린애를 물에 던져버렸습니다.
이 일을 당한 후암두역시 재발 심하여 더욱 열심히 정진했던 것이 선가禪家의 일입니다.

동산수초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찾아왔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여주汝州에서 왔습니다.”
“여기서 얼마나 되는가?”
“칠백리입니다.”
“짚신을 몇켤레나 해어지게 했는가?”
“세 켤레입니다.”
“어디서 돈이 생겨 샀는가?”
“삿갓을 팔았습니다.”
이에 동산이 말했습니다.
“큰방에 들어가서 더 참구하라.”

제대로 된 답변이 아닌지라 더욱 정진할 것을 독려하는 선지식의 또 다른 모습을 동산에게서 보게 됩니다.
사실 석가가세상에 나타나기 전이나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기 전에는 진제니 속제니, 세상법이니 불법이니 하는 것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물로는 물을 씻을 수 없고, 금으로는 금을 바꿀 수 없으며, 부처로는 부처를 구할 수 없고, 법으로는 법을 설 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말(馬)을 고르는데 털 빛깔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미 고수의 위치에 올랐는데 거문고의 실과 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실 본분자리에서 보면 법안이 납자에게 물었던 질문은 배로 왔든지 걸어 왔든지 그게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분별적인 질문마저도 어떻게 보면 묻는자의 분별의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말려드는 납자는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선지식은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방편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방편이 방편인 줄 모르고, 또 묻는 낙처를 제대로 모르면 선문답은 그야말로 우문우답이 되어 버립니다.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서 우문은 현문이 됩니다.
또 우답역시 현답이 됩니다.
우문우답을 현문현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참 공부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결승획괘유허사結繩劃卦有許事는
상진진순반고심喪盡眞淳盤古心이로다
노끈으로 묶고 괘를 그려서 허다한 일을 만들어 버린 것은
참되고 순후한 반고 임금의 본래 마음을 상하게 해버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