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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도둑놈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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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7년 08월 306호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 다니면서 사서삼경을 배웠던 것이 불가와의 인연을 맺게 했다. 한문으로 일기를 쓰고 시를 짓고 했으니까 어쩌면 한글보다 한문이 더 익숙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노인들이 타계하면 팔만대장경을 번역할 사람이 없다’는 기사를 읽었다. 유학을 십년 이상 한 사람도 어려워서 번역을 못한다는 기사였다.
무엇이든 어렵다고 하면 호기심이 발동하는 성질이라서 즉각 해인사로 편지를 썼다. 주지라는 이름을 몰라‘주승님 귀하’라고 편지를 썼으니, 출가의 의미는 더더욱 몰랐다. 곧 답장이 왔는데,‘ 오고 싶으면 백번 생각하고, 그래도 오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오라’는 답이 왔다. 그리
고〈반야심경〉을 적어보내면서 외워가지고 오라고 했다.
한문엔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 당최 무슨 뜻인지 알 수 가 없어서 서당 훈장님에게 가지고 갔다. 그런데 대학자인 그분이〈반야심경〉을 한참 들여다보시더니 슬그머니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그때 결정적으로 생각했다. ‘아, 진짜 어렵구나. 그렇다면 내가 할 것은 이것이다’라고.
〈반야심경〉을 외우고 곧바로 해인사로 갔다. 사십 여년 전, 열일곱 살 되던 해 2월27일, 삼일절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단청 빛깔이 유난히 현란하게 느껴졌던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지났을 때 백련암에서 데리러 왔다. 백련암 성철 스님 시봉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그래야 되는 것인 줄 알고 짐을 싸서 백련암으로 올라갔다. 강원에서 1학년 과정을 듣던 중이었다. 계를 받지 않은 행자신분으론 드문 일이 었는데, 아마도 내가 빨리 공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백련암으로 올라가기 전 두 달 동안은 쏟아지는 잠 때문에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출가 전까지는 머리가 좋았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내 눈에 들어온 것을 그 자리에서 기억했고 책의 내용을 다 외웠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몇 번씩 읽어 외우는 것을 보고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두시 반에 일어나서 열시까지 잠을 자지 못하니까 얼마나 잠이 쏟아지는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한두 시간씩 자다가 나온 적도 있고, 공양을 들다가 숟가락을 들고 졸은 적도 있다. 두 달쯤 지나자 적응이 되었는데, 기억력이 많이 떨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는‘나중에 행자 두게 되었을 때, 그가 잠을 잔다고 하면 허락하리라’생각했으니, 잠은 나에게 최대의 난관인 셈이었다.
성철 스님께선 국과 반찬 등 모든 음식에 소금을 넣지 않는 무염식로 공양을 드셨다. 도마도 따로 쓸 만큼 철저한 무염식이었으므로 시봉인 나도 덩달아 무염식을 했다. 따로 밥을 하기가 귀찮아 그랬던 것인데, 나중에 해인사 강원에 정식으로 들어가 생활할 때 보통 음식을 먹고는 입안이 헐고 벗겨져 혼이 났다. 큰절의 음식이 그렇게 맵고 짜게 느껴질 수 가 없었다.
아침에 큰스님께서 공양을 드시고 나면 설거지를 해놓고 시간이 급해 강원으로 뛰어다니던 생각이 난다. 희랑 대에 계시던 한 스님이‘어디서 오토바이 지나는 것 같아서 내다 보면 내가 뛰어가더라’고 할 만큼 단숨에 내달리곤 했다. 당시 방마다 장작을 땔 때였으므로 저녁마다 아궁이를 찾아가 숯을 만들어 놓았다가 밥하고 국을 끓였다. 석유곤로가 있었으나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내 다음 시봉부터는 곤로를 쓰게 했다고 하니 내가 장작불에 밥을 지어 먹은 마지막 시봉이 된 셈이다.
저녁마다 두 시간씩 큰스님께 안마를 해드리는 것이 시봉인 나의 일과였으니, 겨울엔 따뜻한 방에서 두시간씩 안마를 하고 나면 땀으로 목욕을 했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큰스님께선 자주 나에게 와서 물으셨다.
“니, 도둑놈이제?”
공부를 하거나 공양을 짓고 있으면 갑자기 나타나셔서는 그러시곤했는데, 그럴때마다 항변 하곤했다.
“제가 왜 도눅놈이에요. 아무것도 안 훔쳤어요.”
그러면 다시, ‘도둑놈 아이가?’하시곤 가버리시고는 며칠 후 다시,‘ 니, 도둑놈이제?’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스님은 내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상좌들은 물론 신도들 누구 한테든 마찬가지였다.
절에선 가장 기쁠 때‘내가 밥값했다’라는 소리를 한다. 그러니까 큰스님께서는 신도들이 시주한 음식을 받아먹고 밥값을 못했으니‘도둑 아닌가’그런 말씀을 한 것이었다. 절에서‘니, 밥값했나?’하는 소리는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큰스님께서 해인사 옛 주지실에 계실 때였다. 아침 공양을 짓는데 큰스님께서 해우소에 다녀오시다가 부엌으로 들어오시더니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쬐시는 것이었다. 그때‘어? 도인도 추우신가?’하는 생각이 들어 스님을 불렀다.
“스님!”
“와그라노?”
“큰스님은 춥고 더운 것을 마음대로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생각나는 대로 물었던 순수한 시절이었다. 스님께선 기가 막히신듯 철없는 행자를 쓱 한번 쳐다보고 들어가셨다. 그런데 그날 점심 공양 때였다. 초하루와 보름날엔 삭발을 하고 찰밥을 지었는데, 그날따라 숯불을 잘못 맞추었는지 찰밥이 그만 타버리고 말았다. 다른 때 같으면 용탑선원이나 다른 곳에 가서 얻어 왔을 텐데 시간이 없어서 탄 밥을 그냥 드렸다. 그러자 스님께서,‘ 아침에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서 태웠냐?’하고 물으셨다.
그렇게 늘 밥짓고 청소하고 안마하고 강원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던 행자시절이었다. 그런데 늘 고독했던 것 같다. 당시 백련암엔 초하룻날이나 신도들이 올라올까, 사람들이 별로 올라오지 않을 때였다. 나는 그때 사람이 너무 그리운 열일곱 살의 행자였다. 스님들은 언제나 말이 없었고, 설거지를 하고 와서 보면 모두 벽을 보고 앉아 있기만 했다. 어느 날은‘나도 한번 앉아보자’하고 앉았다가 다리가 굳어서 간신히 일어선 적도 있었다. 사람이 그리워서 일주문 앞에 앉아‘누구 안 올라오나’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땅꾼이나 약초를 캐러 오는 사람들이 올라왔다. 반가워서 그들을 붙들고 일방적으로 내 말을 많이 했다. 행자시절을 그렇게 외롭고 고독하게 견디고 드디어 사미계를 받기 직전, 큰스님께‘원오圓悟’라는 이름을 받았다.
성철 큰스님은 부리부리한 눈에서 광채가 나고 엄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무섭거나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시봉했다. 세속을 떠나와 절에 있는 것이 마음 편했다.
마음이 시원했던 탓인지 해인사에 있는 5년 동안 집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내게 이름을 주시면서‘너는 법전 앞으로 상좌를 해라’하셨다. 은사스님과는 그때까지만 해도 오며가며 스친 적만 있을 뿐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법전 스님을 찾아가‘스님 앞으로 출가하고 싶습니다’
하고 말씀 드렸더니 허락을 하셨다. 사십대의 은사스님 또한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지니고 계셨는데, 그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성불할때 까지 집에 가지 말것’
‘공부 열심히 할 것’
‘계를 잘 지킬 것’
그리고 사십여년이 흘렀다.
20여 년 이상 군승으로 있는 나에게 가끔, 은사스님께선‘뭐 하고 있느냐? 빨리 돌아오지 않고…’하는 재촉을 하셨다. 드디어 내년 3월이면 대령으로 제대를 하고 다시 산승으로 돌아간다. 한평생 공부밖에 몰랐던 스승 곁으로 돌아가 시봉하며 살 생각이다. 매사에 정확하고 계
율에 철저했으며 수행정진에 인욕보살이자 초인적 힘을 발휘하셨던 스승. 그분이 걸어온 한평생은 인간의 발자 취가 아니다. 진정한 도인의 삶이었다. 군복을 벗고 나서 남은 시간, 스승이 걸어온 길을 흉내라도 내볼 생각이다.
다시 행자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으로 그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