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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이나 즐겨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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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이야기 그림 이야기 - 김현정 2007년 08월 306호
오수 午睡 지극한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듯이 지극한 풍광도 필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다. 때문에 그림 속의 여백은 붓질보다 더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묘사보다 저절로 번진 먹색이 더 많은 형색形色을 표현할 수 있다. 때론 선화禪畵에서 자주 쓰이는 여백이나 먹의 번짐 등은 설법으로는 할 수 없는 도를 표현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가염이 주장하고자 하였던 풍부함과 단순함은 붓질 하나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형과 색, 획과 획이 모여서 만들어 낸 조화안에서 이루어진다.

푸르스름한 아침에 창을 열어 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나지막한 앞 산자락도 뽀얀 안개속에서 서너쪽만 흐리게 보일 뿐이었다. 새벽녘에 비가 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것이 안개가 되었나 보다. 산중이라면 이 아침 운무가 오가는 모습이 얼마나 장쾌했을까 싶어 문득 아침 댓바람부터 책을 꺼내 들고 옛 그림들을 찾아 보았다.
역 시 운무雲霧라면 강남산수가 아니던가. 남송의 마원馬遠, 하규夏珪가 그려냈던 산수를 제일 먼저 내 방에 들여놓았다. 아득하면서도 평화로운 운무 속에서 그림 속 저녁 새들은 저희 둥지로 날아가기도 하고, 뱃 사공들은 강물에 띄웠던 그물을 걷어 집으로 향하기도 한다. 이내 눈길은 산중의 잘난 소나무 한 그루 감상 하다가 그것과 어우러진 봉우리에 눈이 간다. 봉우리 아래에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시냇물의 흐름은 이내 장강의 큰 물결과 만나기도 하였다. 그 물결 너머에는 안개나 혹은 낮은구름이 거리를 만들고 그 낮은구름 저 너머에 잇닿은 산봉우리의 실루엣이 조근조근하다. 비록 작은 사진 속의 그림이지만 작가의 붓질을 따라 눈길을 돌리며 잠시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고 나니 마음이 일순 즐거워지면서 아하, 이것이 바로 와유臥遊가 아니던가 하였다.
이가염(李可染; 1907~1989)은 중국의 대표적인 화가 중에 하나로 꼽히는 인물로 중국전통회화의 정신과 필묵에 대한 이해를 크게 높인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강소성 서주徐州출신으로 그리 문화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은 아니었다. 어린시절 13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상해, 항주 등지의 미술학교에서 중국화와 서양미술을 공부하였다.
그는 산수화를 그릴 때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대상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대상의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내고 그리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밝힌다는 의미이다. 말인즉슨 쉬우나 어지간한 내공이 아니고서야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그는 그림에 있어 풍부함과 단순함을 강조하였는데, 일견대조적으로 보이는 이 두가지 개념은 그림속 이야깃거리의 풍부함과 구성의 통일을 통한 단순함으로 이해된다. 비록 그는 평생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으나 그림을 통해 무엇을 전달해야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 임제 화상(臨濟義玄; ?~867)께서“어떤 것이 세 가지 밝은 눈의 국토입니까?”하는 질문에 그중 법신法身은 설법으로 할 수 없다 하고, 이것은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또 마음 안에서도 얻지 못하는데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가 하시었다.
지극한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듯이 지극한 풍광도 필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다. 때문에 그림 속의 여백은 붓질보다 더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묘사보다 저절로 번진 먹색이 더 많은 형색形色을 표현할 수 있다. 때론 선화禪畵에서 자주 쓰이는 여백이나 먹의 번짐 등은 설법으로는 할 수 없는 도를 표현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가염이 주장하고자 하였던 풍부함과 단순함은 붓질 하나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형과 색, 획과 획이 모여서 만들어낸 조화안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날 임제 스님이 선당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황벽 스님이 방장실에서 내려와 졸고 있는 임제의 모습을 보고, 주장자로 선상을 한 번 쳤다. 임제 스님은 얼굴을 들어 황벽 스님인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졸았다.
황벽스님은 또 한번 선상을 쳤다. 그리고 선당의 윗간에 수좌가좌선하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랫간의 후배가 좌선을 하는데, 그대는 여기서 번뇌 망상만 일으키며 무엇을 하느냐?”
수좌가 말했다.
“이 노인장이 무슨 소리를 합니까?”
황벽스님은 선상을 한 번 치고는 바로 나가 버렸다.
뒷날 위산스님이 앙산에게 물었다.
“황벽스님이 승당에 들어간 의미는 무엇인가?”
앙산스님 이말했다.
“두개의 주사위가 한 번의 승부로 나타났네.”
요는 황벽 스님이 보기에 졸고 있던 임제 스님은 좌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좌선을 하고 있던 수좌는 번뇌망상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 것이다. 수행자는 행주좌와가 한결같아 순간순간이 모두 수행이라고 하였으니 좌복을 갖추고 눈을 부릅뜨고 있은들 생각이 천리만리가 있다면 그것을 어찌 좌선이라고 할 일인가 싶다. 그러나 범부의 마음 속 생각은 구름 같고 물 같아 품어도 품은 것이 아니고, 막아도 막은 것이 아닐 일이다. 한순간도 쉬지 않으니 여일한 경지는 어디쯤 가야 있겠는가. 아직도 갈 길은 먼데 다리는 벌써 아프다.
이가염의 그림 속 노인은 좌선坐禪을 하고 있는 것인가 혹은 좌수坐睡를하는것인가.
포도시렁 아래에서 그늘을 벗 삼아 졸고 있는 노인의 잠든 모습은 웬만한 방해로는 깨어나지 않을 기색이다. 편안하고 한가로운 낮잠을 즐기고 있는 노인 앞에 황벽선사가 나타나 주장자로 다시선상을 친다고 하여도 상관이 없을 듯하다.
노인의 머리 위에 늘어진 포도넝쿨은 여지없이 헝클어져 있는데, 마른 필선으로 엮인 줄기와 옅은 먹물로 표현한 포도잎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포도넝쿨의 어지러움은 그 아래에서 잠을 청한 노인의 편안함과 대조를 이루면서 그의 낮잠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살이의 고단함과 복잡함도 오수午睡의 한가로움을 방해하지 못 할 일이다.
오늘은 아침 내내 내려앉은 안개가 오후가 되도록 개운하지 않다.
눅눅한 방에 불을 때고 온기를 친구 삼아 배를 깔고 누우니 솔솔 잠이 새어들어 온다. 오전 내 와유臥遊로 즐거웠으니, 이제는 다시 꿈속에서 노닐어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