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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는 본분사 하나를 위해서 살다 죽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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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도현 / 지리사 연암 2007년 07월 305호
“행자님, 세상 별 게 있나요. 어쨌든 스님 잘하고 있으면 좋습니다.”
절에 불공드리러 온 할머니들은 열네 살인 내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 말씀들이 내겐 은연중 무상법문이 되었고, 세속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 애늙은이가 되게 했다. 할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유복하던 집안이 무너지자, 어머니는 밥을 굶기지 않기 위해 나를 절로 보내셨다. 여러 형제 중 유독 나만 절에 왔던 걸 보면 수행자 될 인연이었을 것이다.
비구와 대처가 완전히 갈라지지 않았던 1960년대 초반의 절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피폐했기 때문에 행자가 하나 들어오면 일꾼으로 생각했다. 나무하고 동네 일을 하러 다니면서 행자시절을 보냈다. 절에 소가 없어서 마을에서 소를 사흘 빌려 쓰고는 가을이면 그 집에 품앗이로 가서 보름 동안 일해주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하고 노는게 재미있어 좋았던 시절이다.
행자시절 때, 농사 짓는 일 모두를 배웠다. 논을 갈고 모심고 논 매고 타작해서 방앗간에 가는 일까지 다 했으니, 나는 행자 농부였던 것이다.
부산의 장산 자락에서 2년 동안 세 군데의 절을 옮겨 다니면서 일만 하고 살다가 세 번째 절에서 은사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내게 지게를 맞춰주지 않았고 사흘을 기다려도 일꾼들을 따라 나무하러 가라는 소릴 하지 않으셨다.‘ 이상하다’하고 있는데, 부르더니 염불을 시켜보셨다. 내 염불을 들어보시더니‘대처승 가락을 닮았다’
하시곤 다시 익히게 했고,《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쳐주셨다. 손바닥을 맞으며 그 책을 다 외우면서 어렴풋이‘중노릇이무엇인가’를 알았다.
나의 은사이신 덕명 스님은 체격이 크고 성격이 불같아 그 앞에 서면 누구든 주눅이 들었으나 어린 행자인 나에게는 인자하게 공부를 가르쳐주시면서 수행자로 키우려 하셨다. 굉장히 부지런하고 무슨 일이든 미루는 법이 없었고, 밤새워 기도를 해도 끄떡없을 만큼 활력이 넘치셨던 분이다. 지금도 스님 방 벽에 걸려 있던 글귀를 기억한다.
‘장부에겐 하늘을 떠받칠 만한 기개가 있으니, 부처님 가신 길도 나는 가지 않겠다.’아마《선요禪要》에 나와 있는 말일 텐데, 얼마나 자주적이고 당당한가. 스님은 그렇게 당당하게 사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제자들에게 의지하지 않으셨다. 중노릇에 대한 행해가 밝으셨던 분이니, 그
분은나에게부모님같은분이었다.
1965년, 범어사에 가서 동산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비로소 중이 되었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삼월 보름이었다. 일주일 후 동산 스님께서 입적하셨으니 우리가 마지막 수계자가 된 셈이다.
계를 받고 나서 선방으로 가 있다가 방위로 군생활을 마친 다음 행자시절을 다시 한 번 더 보냈다. 제대할 무렵, 한 노스님에게‘제대하고 어디로 공부하러 가면 좋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전강 스님이 계신 인천 용화사나 통도사 경봉 스님에게로 가라’고 하시면서 덧붙이
기를,‘ 두 분의 사람 다루는 법이 다르니, 경봉 스님은 사람을 순리대로 다루어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나무랄 것은 나무라는데, 전강 스님은 칭찬할 것도 역으로 나무라시는 분이다’라고 하셨다. 당시 이십대 초반이었던 나는 어쩐지 전강 스님의 방식에 더 마음이 끌려 용화사를 선택했다.
‘바로 선방으로 가면 별 효험이 없다. 가까이서 전강스님을 모셔 봐야 한다’하는 노스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가 그대로 실천했으니, 그것이 용화사에서 행자시절을 다시 한 번 더 하게 된까닭이다.
전강스님 회상의 특징은 행자라하더라도 각자의 일이 끝나면 정진을 시키는 것이다.‘ 갓 출가한 행자라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 화두 들고 죽음에 대처할 방법은 가지고 행자노릇을 해야 한다’하셨으니, 그것이 전강 스님의 주된 사상인 무상관이었다. 그곳 주지스님을 도와 법당을
고치는데 목수 노릇도 하고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고치기도 하면서, 한편‘이뭣고’화두를 들고열심히 정진했다.
그러나 낮엔 일하고 실참도 없이 몸에 익숙하지도 않은 공부를 하자 상기가 올라와 드디어 앓아 눕고 말았다. 눈을 감아도 떠도 가슴에 불덩어리가 차 있어 선방을 물러나와 객실에 누워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겨울비가 축축이 내리던 날은 고향 생각도 나고 스님들의 무관심도 차갑게 느껴져 눈물이 쑥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전강 스님께서 찾아오셨다. 행자 하나가 주지스님을 도와 일도 잘하고 정진도 열심히 하는 것 같더니 언제부터인지 보이지 않자‘성안 행자 어디 갔느냐’하고 물으셨던 것이다. 사정을 듣고 찾아오신 스님께‘몸살이 나서 그런가 봅니다’하고 황감함을 담아 말씀드렸더니 당신 방으로 올라가셔서 박카스와 무슨 약을가지고 다시 내려오셨다. 하늘처럼 여기던 스님께서 그러하시니 너무 감동이 되어서 눈물이 났고 스님의 그 인자한 마음에 용기를 내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시 일하며 선방에서 정진하고 있은 지 한 달쯤 되자 스님께서 시자를 보내 올라오라고 해서 갔더니, 그러시는 것이었다.‘ 야야, 네가내시봉좀해라.’
그렇게 해서 가까이서 스님을 꼬박 1년을 모셨다. 그일 년을 통해 나는 비로소 수행자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 스님은 일 년 열두 달, 새벽예불 때마다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셨으니, 그 법문을 들으면서 수행자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던 것이다. 스님은 자주 말씀하셨다.
“수행자는 본분사 하나를 위해서 살다가 죽어야 된다.
세상 살아가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하고, 중은 세상 사람들이 안 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화두 하나 챙기는 일이다. 중노릇을 하다가 나이 들어 죽을 때가 되었을 때, 걸망 메고 시골길을 가다가 따뜻한 논두렁 밑에 가서 걸망을 메고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화두를 놓지 않으면 그게 중의 본분사다. 중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스님의 그 말씀을 들으면서‘아하, 그것이 중노릇이구나’하는 것이 뇌리 속에 박혔고, 그것으로 인해 전강 스님은 40여 년의 승려생활 동안 늘 내 마음 속에 계신다.
전강 스님은 마음으로 중을 만들어주셨으니, 내 인생은 그분을 통해서 달라졌다. 그러므로 스님과의 만남은 내중노릇 가운데 가장 보배로운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나에게 용화사로 가보라고 했던 노스님의 말씀처럼 전강 스님은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 안하시고, 잘 못하는 것은 찾아서 나무라셨다. 불 때는 것, 소제하는 것, 집안에 드나드는 행동거지에 대해 일일이 눈여겨보셨다. 하도 고단해서 부엌에서 불을 때면서 잠깐 졸고 있으면 어떻게 아셨는지 금방 불러들여서 조금도 쉬게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 행자들이 스님의 나무람으로 인해 입이 좀 나와 있으면 불러서‘야야, 내가 너희들이 미워서 그러냐. 사람이 잘하는 걸 잘한다고만 하면 넘치는 법이다. 잘못하는 것을 꾸짖어주면 고쳐서 좋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속상했던 우리들의 마음이 금방 풀어지곤 했다. 그땐 스님께서 타심통을 하셨나 했는데, 세월이 흘러 나이 들고 보니, 당신 또한 일찍 출가하시어 그런 세월들을 겪어왔기 때문에 다 꿰뚫어보고 일일이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님의 일상생활 자체에서 자연스레 많은 것을 배웠다. 밤 9시에 방선을 하고 대중스님들이 흩어지면 시봉하는 우리들이 선방에서 잠을 잤는데, 스님은 우리가 잠들었다 싶으면 다시 오셔서 선정에 드시곤 했다.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 정진하시다가 새벽녘에 잠깐 눈을 붙이곤 새벽예불에 나오셨던 스님의 고요한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시봉하는 동안 전강 스님을 하늘처럼 신信했다. 일거수일투족이 부처님 같았으니, 일상생활과 법문을 통해서 나는 수행자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행자 시절은 부처님을 모시면서 수행자의 본분사를 익혔던 가장 간절하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