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볕이 가든한 오후, 백양사 사천왕문을 지나자 커다란 보리수 아래 스님이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빗장 걷어낸 자리에 누군가 서 있기라도 한 듯 문가를 바라보는 표정이 볕처럼 가든하여 좋은 일이 있는가 여쭈니, 중학교시절 은사님이 오시는 날이란다. 그러더니 사천왕문을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저기서 새벽기도를 해요. 전에 계시던 강주스님이 오래도록 그러셨듯이 나도 기도하고 있어요.”
스승의 마음은 다 같은 것일까. 이제 한 총림의 강주가 되어 학인 스님들의 스승이 된 스님을 만나러 오는 은사님의 그 시절 마음도 스님의 새벽기도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집안 살림이 어려워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스님의 손에 당신의 월급봉투를 쥐어주셨던 은사님, 그 마음이 어찌 부처님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오랜만에 선생님을 만난 스님은 마치 아버지를 만난 듯, 형제를 만난 듯,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발그레해졌다. 왜소한 체구가 딱 닮은 사제지간이 손 맞잡았고 옛 얘기들을 나누니 그 정겨움은 밤을 넘겼다.
역경이 참 많았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니 부모님이 헤어져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가서 3년을 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시 고향 칠갑산 아래에 와서 살았다. 고향에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선생님이 첫 학비를 대주셔서 명문 학교인 공주사대부고에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가진 거라곤 호주머니에 든 이 만원이 전부였다. 하숙집에선 그 집 애들 과외를 해주며 기거했고 매일 아침 두 시간씩 신문을 돌려 돈을 벌었다. 그런 탓에 지금도 뜀박질엔 자신 있어서 축구를 해도 지치지 않고 뛴다. 그러니 스님의 체력은 가난을 역전시킨 삶에 대한 긍정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공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출가를 결심했다. 모두들 반대할 때, 단 한 사람만 찬성해 주었다. 그 유일한 사람이 바로 오늘 만난 선생님이다. 사모님은 양장점을 했던 솜씨로 손수 승복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스님이 거처를 옮길 때마다, 오늘처럼 선생님은 한번씩 스님을 찾아오셨다. 그랬던탓에 어렵던 상황 앞에서도 스님은 결코 어렵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삭발을 하니까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싱글벙글했어요.”
너무 좋아서 자신감도 생기고 의욕도 솟았다. 통도사 강원에 들어가서《치문》을 보는데, 보통 서너 줄을 가지고 하루 종일 씨름하는데 스님은 한 이삼십 장을 쭉 읽어내렸다. 그렇게 6개월 공부하고 났더니 할 일이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숙부가 주신 천자문 책을 혼자서 다 떼고 고등학교 때 삼천 자 한자를 다 뗐던 터라 글자를 읽어내는 데는 막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객기를 부리며 5년을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거울을 봤는데 수행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91년 가을, 화엄경까지 딱 마치던 날 걸망 지고 만행을 떠났다. 그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사이 거처를 25번 옮겼고 지금 방안에 있는 책들을 12번이나 옮겼다. 은해사 승가대학원 1기생으로 공부하기도 하고 해인사에서 강사를 하기도 하고 봉암사 선방에 앉기도 하고, 그렇게 5대 총림을 다 돌며 공부하다가 선방에 갔다가 공부하기를 반복하며 살았다. 선방에 앉아서는‘무無’자 화두를 들고 경전 공부를 할 때는 관세음보살을 염송한다.
“수행을 겸한 공부가 내가 추구하는 바예요. 힘 낼 수 있을때까지 그렇게 계속 공부하려고 해요.”
여러 스님들의 말에 의하면, 매사에 열심인 스님이라고 했다. 경전 공부에도 정진에도 축구에도 노는 데도, 그 무엇을 해도 여러 스님들과 어우러져 열심이라고 했다. 스님과 얘기를 하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돈 말은 ‘한 치의 미혹 없이’였다. 어찌 그토록 한 치의 의심도 미혹도 갈등도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스님은‘끝!’이라고 소리 한번 와락 지르면 정말‘끝’이고,‘ 시작!’이라고 하면 정말‘시작’한 지도 모르게 이미
‘시작’해서 저기 앞서 가고 있었다.
“별거 있나? 만세삼창하면 돼요.”
세상 모든 이들이 두 손 올리고‘만세’라고 외치면 근심도 백짓장처럼 가벼워지고 환해진단다. 세상의 모든 역경에 대해서 인정하라는 뜻이다. 누군가로 인한 눈물도, 세상이 나에게 준 시련도 긍정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거기에서부터 행복이 시작 된다는 뜻이다. 어려울 것 없다며 스님이 갑자기 만세삼창을 하신다. 더께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오후다.
스님은 통도사 강원을 마치고 통도사에 머물며 이 년 동안 별도로 화엄경 공부를 했다. 그 당시 월하 방장스님이 배려를 해주셔서 강주하시던 원산스님이, 현재송광사강주로 있는 스님과 법광스님 둘을 앉혀 놓고 꼬박 두 시간씩 강의를 해주셨다. 그러고 나서는 열 달 동안 둘이서 화엄경 40권을 다 보고 나서야 걸망 지고 통도사에서 나왔다.
“내게 그런 경험이 있어서, 이총림의 학인스님들도 화엄경을 다 보고 졸업하게해요. 신심으로공부하는것이기 때문에 가능해요.”
그렇게 두반을 졸업시켰고 현재 세번째반이 한마음으로 화엄경을 공부하고 있다. 스님은 강원에서만큼은 한문으로 된 경전을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한문으로 보면 좀 더 심도 있는 공부가 되기때문에 감동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원에서 한문 경전을 접하지 않으면 졸업하고서는 접하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장래를 봤을때는, 현재 번역이 안 되어 있는 경전들이 해석 되어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님은 강원에서 만큼은 전통 방식을 따라야 할 것을 강조한다. 스님은 적어도 10년 가까이는 대중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강원에 있는 동안엔 열심히 과정을 따르는 것에 충실할 것을 권한다. 그러고 나서, 졸업때가 되면 각자의근기에 따라 진로를 결정하라고 한다.
“중 벼슬 닭벼슬이라고 하잖아요. 강주를 하는 것은 그냥 소임일 뿐이지 벼슬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말 그대로 소임을 다하는 것이고, 언제든 인연이 아니다 싶으면 다시 걸망지고 참선하러 가야지요.”
선원과 강원 사이에서 인연에 따라 왔다갔다하는 것, 그것이 스님의 원력이다. 처음부터, 뛰어난 선사 밑에서 공부하지 못한다면 교육기관의 과정이라도 충실히 밟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러다 보니 출가 20년만에 강주라는 소임을 맡게 되었을 뿐이다. 벌써 강주로 산지도 2년가까이됐다.
스님의 책상 위에 글자들이 새까맣게 매워져 있는 원고지 1500매가 쌓여 있다. 작년 봄에 각성 스님이 이두를 달아놓은 원각경을 스님이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면서 지난 여름에 불교방송국 라디오에서 4개월 간원각경 강의를 했다.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강의는 호응이 좋아 방송국에서 스님을 붙잡았지만, 스님은 일체의 미혹 없이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99년도에 해인사에서 강사로 있을 때 선원에서 일주일 용맹정진을 했는데, 그땐 잠 한숨 자지 않고 일주일을 꼬박 앉아서 버텼다. 봉암사에서 선감 소임을 볼 때는, 핸드폰 딱 끄고 일년 동안 산문 밖 출입 한번 않고 수좌스님들과 결사했다.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써왔는데 출가하고선 한번도 글씨를 잘 쓰기 위한 글씨를 써 본적은 없다. 잘못하면 수행인이 아닌 예술인으로 보일 수 있겠다 싶어서 경계했다. 만약에‘글 쓰는 스님’이라고 지칭되면 잘못 산 수행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진하는 스님이되 글씨도 좋더라는 말을 듣는 것이 수행인으로서 맞다고 생각됐다. 지금도 취미로 글씨를 쓸 뿐이다. 그렇게 한 치의 미혹 없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걸어왔다지만 출가한 지 올해로 22년, 누구나 인생에 있어 회의가 들 때가 있고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럼요. 있었죠. 공부가 5년쯤 될 무렵에 굉장한 회의에 빠졌어요. 명색이 출가해서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더라고요.”
그때 마침 각성 스님이 범어사에서 일주일 동안 경전 강의를 했는데, 그 강의를 들으면서 5년동안한공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것을 알았다. 그 깨우침으로 화엄경공부에 매진했다. 결국 회의 가정진에 박차를 가해 주었다.
“10년 되던해엔‘도가무엇인가’고민하느라 회의에 빠졌지요.”
마침 통도사에 율원이 생겼다. 월하 스님이 객기가 많았던 법광 스님을 데려다 공부시키라고 해서 일년 동안 율원에서 지내며,‘ 도’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익는 것이 도라는 것을, 몸으로 자연스럽게 익어지는 것이 최고의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객쩍게 부리는 혈기가 많다고는 해도 출가 이후 한번도 수업, 공양, 예불에 빠져본 적 없다. 그러니 스님의 열기는 삶에 대한 지극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얘기가 아닐 것인가. 자유는 무언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자유롭게 두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찾은 것이듯, 스님은 스님의 이상대로 어제 그랬던것처럼 오늘도‘주유천하周遊天下’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년 정진하고 나면 자유인이 되어 주유천하周遊天下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살아왔어요. 20년 정진한것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요.”
스님이 흥얼흥얼 노래를한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서정미가 물씬 느껴지는 가요들이다.
“인생이 묻어 나는 노래들이 좋아요.”
어려서부터 어렵게 자라고 그보다도 더 힘겹게 살아왔는데도 스님은 매사에 낙천적이다. 스님은 눈물이 진득하게 배어 있는 인생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 노랫소리를 들으니 우리 생에 노래하지 못할 것이 무엇 있을까싶어진다. 게다가 낭만적 이기까지한 스님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내내 노래를 흥얼거린다.
“난 돈이 만원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차 못타면, 걸어가면 되지요.”
그 말이 마치 노래 가사 같기도 하고, 영화 속에 나오는 아나키스트의 명대사 같기도 하고, 내가 보지 못한스무 살 시절의 아버지가 중얼거린 말 같기도 하고, 부처님의 말 같기도 했다. 그래서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됐다. 고향에서 떠나올 때 호주머니에 들어 있던 돈, 그 이만원을 들고지금 어디로 가고 계시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