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부처님 사랑해요, 감사해요"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이달의 이야기 - 서지미 2007년 05월 303호
내가 처음으로 부처님전에 앉아본 것은 2000년 4월의 어느 토요일.
‘무겁고 답답함’그리고‘그리움과 인생의 불공평함’이 4월만 되면되살아나던 때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고3이었던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은 일. 그 일로 인한 가족의 충격이‘웃음 잃음’으로 나타났고, 부모님을 비롯하여 할머니 우리 형제자매들은 정신적으로 우울함과 안
타까움이 세밀화처럼 예리하게 새겨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일이 그렇듯이‘언제 너희 집에무슨 일이 있었는가?’하는 이유없음의 시간이 흐르고, 날마다 새롭게 시작되는 하루하루에 몰입하면서 동생에 대한 그리움을 작은 씨앗으로 만들어 갈 즈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남동생의 죽음이 4월 5일. 아버지의 세상 떠나심이 3년 후인 4월 13일. 잔인한 4월이여! “탐심貪心은 돈단頓斷이 가능하지만 애심愛心은 점단漸斷에 가까운 거같다”고 이평래 교수님께서 말씀하
신 적이 있는데, 그 말씀이 옳은 듯13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시리다.
남동생의 죽음은 황당함 그 자체였고, 기독교 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겐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더욱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 동생이예수님의 존재를 모르고 이 세상을떠났기 때문에 지옥세계에 들어가있다는 것. 그곳에서 갖가지 고통을 받으며 악마의 세계에서 헤매고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저렸다.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명랑함으로 주변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가? 부모님
특히 아빠에 대한 효孝는모든사람들이 칭송할 정도로 높아서 늘 든든함을 주었던 아이. 아빠가 몸이좀 피곤하시면 업고 다니며 노래를 불러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영특하고 친구간에 의리義理가 있었던 아이.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나던 4월 5일도 고3의 닻을 올리며“파이팅”을 외치고, 멋지게 생일파티를 하고 친구들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그런아이가 이 세상에 와서 지옥에 갈만한 나쁜 일과 나쁜 행동을 할 시간이나 있었단 말인가?
그런 의문과 회의를 가지고 일상생활을 꾸려가고 있을 때 아버지의세상 떠남은 삶에 대한 가혹함이었다. 추스를 수 없는 슬픔과 동시에‘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음’으로다가왔다.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의 사이가 이렇게 가깝단 말인가?참으로 허무했다. 정말 하루아침사이였다. 아버지의 세상 떠남은죽은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었고,유난스런 자식사랑, 그런 부모에대한 우리들의 애정표현이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었고, 그런 상황들이시시각각으로 아버지의 발길을 눈길을 멈추게 하였던 것이다. 59세의 세상나이를 접고 동생 만나러 떠나신 아버지. 그래도 위안인 것은 보고 싶었던 아들이 그곳에 있으니 마음껏 보고 안아주시고 이야기 나누고 계실 거란 생각이었다.
그럴 때면‘아빠 소원 성취하셨네요’‘서승윤! 너는 아빠 실컷 보겠다’며 먹먹한 가슴을 타고 올라오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혼잣말로 잠재우던 시기였다. 그때만 해도 성경적인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괴롭지만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엄마의 슬픔은‘교회 열심히 다님’으로 인도되었고, 나의 슬픔은연구소 생활의 무의미성과 서울로다니던 대학원 생활이 힘겹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빠 돌아가시고 3년후부터 엄마의 동의하에 목사님 수준이신 큰형부 주도로 아빠 제사가추도식으로 바뀌었다. ‘이건 아닌것 같은데…’하는 반발심.‘ 아빠가제사를 얼마나 중요시했던 분인데…’그것을 아는 사람은 엄마와 나뿐이었다. 나는 늘 아빠의 그림 자처럼 따라다녔기 때문에 아빠의
생각과 바람 등을 잘 알고 있었다.조용히 그러나 간곡히 이야기했다.
“우리가 죽으면 제사나 추도식 같은 거 안해도 되지만, 아빠는 유교를 따랐던 분이시고 조상에 대한예禮를 중요시했던 분이신데, 제사를 올리면 어떻겠냐”고. 엄마는“다소용없는 짓이다”라고 하셨고, 형부 역시“돌아가신 분의 뜻을 새기는 것이 중요하지 제사 올리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다”라고 하셨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두 분 다맞는 말씀이었지만 마음이 허전했다. 그 다음해부터 아빠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표면적인종교생활에는 변화가 없는 듯 일요일마다 성가대 활동, 월요일마다직장 신우회 성경공부에 참석하면서 습관적인 종교생활을 유지해 갔다. 그렇지만 신심이 없었다. 목사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한마디로 시험에 든 것이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은‘오, 주여!’를외쳤다.
그해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교리공부를 시작하지 못한 채, 2000년 4월을 맞이하게 되었고, 개인적인힘겨움과 생활의 재미없음이 맞물려서 새천년의 희망과 장밋빛 미래세계에 대한 뉴스들이 연일 계속되었지만 전혀 자극이 되지 않았다.
대신‘무겁고 답답함’그리고‘그리움과 인생의 불공평함’이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화창한 4월의 잔인함이 눈물이되어 주체할 수 없이 옷을 적시던 그때, 퇴근시간이 되기도 전에 운전대를 잡고 한없이 막연히 계룡산을 지나 공주를 지나 낯선 곳으로 들어선 시골길. 알 수없는 시골길이었지만 그 길가에‘마곡사’라 씌어진 이정표 하나가 눈길을 잡았다.‘ 그래. 절에 가보자.’내가 이렇게 답답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돌아가신 아버지께 제사를 올리지 못
하는 것 때문인데, ‘절에서는 제사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헤매면서 찾아간 마곡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혼자서걸어 올라가는 길이 십리 같았다.
그리고 무서웠다. 어찌할 수 없는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길 건너편에 큰 기와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곳에 뭐가 있는거야…?’잠재의식 속에 심어져 있던 우상숭배와 미신의 장소가 떠오르며 공포심이 생겼다. 화창한 봄투명한 햇살과 어울리지 않게 눈물로 얼룩진 눈두덩이가 자두처럼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 눈가를 컴팩트로 서너 번 두드리고 법당에다다랐을 때,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혜진이의 안내를 받고부처님 앞에 처음으로 앉았다. “부
처님 그때의 제 모습을 기억하시지요?”교회에서 기도하듯 두손을 깍지끼고“… 해달라 … 해달라”특히“저는 부처님을 몰라요, 그리고 좀무서워해요.”그렇지만“아버지 남동생 구원해 주세요.”눈물 반 기도반 그렇게 두세 시간 하소연하던모습. 아마도 부처님께서 나처럼이상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부처님과의 첫 만남을 시작으로 성경과 불교서적을 오가며일년을 보내고, 2001년 사찰수련회에 참석하여 아빠와 남동생에 대한그리움을 털어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뵈었던 스님의 모습도 신기했다. 반짝반짝한 머리, 조용한 목소리, 활기찬 듯 자유로운 듯한 걸음걸이, 좀 멀리서 보면 모두 할아버지같이 보였던 그 스님들의 가르침이 약이 되었다.“ 동생이 인연 따라
이생에 왔다가 짧지만 그만큼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다가 간 것이지결코 지옥에 가 있는 것이 아니며,아버지와 동생의 인연 또한 그렇게만났다가 그렇게 헤어져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과‘죽음의 세계가 이해 안됨’‘인생이 불공평함’을 느끼고 있던 나의 시각이 새로운 종교를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씀. 그 후로 아버지의 세상 떠남이, 남동생의 죽음이 안타
깝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음속에쌓여 있던 의문들을 부처님말씀에 대입해보면 술술 풀려 나갔다. 마치 2차방정식처럼 깔끔했다. 그리고 간단명료했다.
그리하여 2002년부터 불교대학에 다니기 시작했고, 전공이 화학공학이었던 나는 02학번을 달고 내삶의 O2(산소)를 부처님 말씀으로채워 나갔다. 경전연구반에서《화엄경》을 공부하고 있는 지금까지,왠지 모를‘끌림’‘환희심’등이 나를 깨어 있게 만들어준다. 교회에서“예수믿고 천당가자”고 하는 믿음의 모토는‘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함’인데, 이와 같은 영원한 생명을 불교적 관점으로 보면‘참나의모습을 놓치지 않는 것’이것이‘영원한 생명이 아닐까?’
2002년 해인사 수련회를 통해 알게 된 1080배의 절. ‘절’이 뭐야?어떻게 하는 거야? 왜 하는 거야?‘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시절. 그러나 2004년 5월 5일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중심축을 이루고있는 것은 다름 아닌 108배와 10분좌선이다. 그리고 가끔 이벤트처럼올리는 3000배의 절. 그 올곧한 시간을 통해, 참나의 모습을 찾아보며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智慧眼
발원을 올리는 것이다.
불기 2551년 5월 24일 부처님오신날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님께 귀의하오며“참 좋으신 부처님 사랑해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