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도를 생각하리라. 나는 무엇을말할까. 도를 말하리라. 나는 무엇을 행할까. 도를 행하리라하여도를생각하는마음잠깐인들잊으리까.”
그 게송이 얼마나 마음으로 사무쳐 들어왔는지 그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열다섯 살의 나는 그 게송을듣고 생각했다.
‘ 맞다!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를생각하고 말하고 행한다면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바로이길이다’
하고.바로 그날 그 자리에서 분황사에 눌러 앉았으니 그것이 나의 정식 불교에의 입문이었고 행자생활의 시작이었다.
천수경을 일주일 걸려 외웠고 염불이며 불공을 배웠다. 새벽도량석을 하고〈초발심자경문〉을 줄줄 외우면서 나무도 하고 청소도 했다. 은사스님과 노스님 시봉도 하면서 바쁘게 지내게 되니 자연스레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무엇보다 학교공부가 시시했다. 아마 반쯤 학교에 다니고 반쯤 절에서 일하고 공부하면서 중학교를 졸업하고고등학교에들어갔을것이다.
절에서의 생활은 고되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잠이 부족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도량석을 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밤 10시쯤 되어서야 일이 끝나면 그냥 잠을 잘수가 없었다. 노스님의 팔다리를 주물러드리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두어 시간을 졸면서 주무르고 나서 12시에 잠들었다가 새벽 세시에 일어나는 일은 잠으로클 나이의 중학생에겐 힘든 일이었다. 저녁에 설거지를
도를생각하고도를말하고도를행하리라 하고 나면‘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낮이면 일하
랴 학교에 다니랴 바빠서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6개월쯤지나니까 익숙해졌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좀 억울한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꼬박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3년 동안 행자생활을 보내고 수계를 했는데, 대부분 다른 사람들은 하루 만에 머리를 깎은 것이었다. 40여 년 전 당시는 지금처럼 합동수계를 하지 않고 개인 수계를 했다. 법회를 하는 자리에서
“출가할 사람은 손 들라”고해서손을든사람은 그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수계식을 거행했다. 그러니 행자생활이 따로 필요 없었다. 대부분 하루 만에 삭발시켰고 길어야 한 달이었는데, 무척이나 중이 되고 싶었던 나는 3년을 꼬박 채우고 수계를 했으니 억울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않은가.
그래도 나는 그때 은사스님이 생불生佛인 줄 알고 살았기에 견딜 수 있었다. 은사스님이 회초리를 들면 모두 천리, 만 리 달아났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부처님이라 생각했기에 그분께 맞는 일이 업장을 소멸하는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 저 초등학교 때 읽었던‘고행’이라는 덕목이 가슴에 각인되어 있던 탓이기도 했을것이다.
나의 행자시절은 고행의 연속만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불교학생회 회장을 했고 영남불교학생회 회장을 지내면서‘위대한 신라 불교를 중흥, 재현하리라’는 원력으로 꽉 차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시절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왜 출가를 했는지, 무엇 때문에 중노릇을 하는지에 대한 답이 뚜렷했다. 수행자에 대한 자기 정립이 확고부동했던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광도중생廣度衆生’이 늘 사무쳤고‘불교를 중흥해야 한다’는 신심과 원력이 가슴에 뭉클대고 있었다. 찬란했던 신라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는 탑터나 절터를 답사할 땐 얼마나 마음이 숙연해지곤 했는지 눈물을 흘리면서‘불교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원력을 되새기곤 했다. 그때의 그 숙연한 원력과 뜨거운 신심이 지금까지 수없이 법문을 해오면서 나를 일으켜 세운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행자시절, 은사스님은이렇게말씀하시곤했다.“누군가‘너, 대통령 할래? 중 할래?’라고 물었을 때,중이란 모름지기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일이란 아지랑이 같고 꿈과 같고 번갯불과 같고 허황한 것입니다. 대통령, 설사 전륜성왕의 자리에 앉게 하고 이우주법계를 통째로 준다고 해도 저는 중이 되겠습니다.’라고하는자라야중노릇제대로하는것이다.”사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똑같은 질문 앞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되돌아보는 요즘이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행자시절이나 사미 초기 때의 초발심이 중노릇 전부를좌우하는것같다.
저 뜨거웠던 초발심의 세월을 지나 어느덧 오십이 넘었다. 나이 오십이면, 하늘의 명을 알 나이인데 그것은 고사하고 나의명도 알지못한채 살고있다.
자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중노릇을 할수록 더 신심이 있어야 하고 더 간절해야 하는데 그러고 있는지, 수행자란 열심히 수행하고 교화하는 일밖에 다른 것이 없는 법인데 날이 갈수록 신심은 엷어지고 어긋나는 길로 가고있는거나 아닌지말이다.
군대에 다녀와 지리산 칠불암에서 재발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려고 집엘 들렀다. 홀로 동생들을 키우면서 고생을 하시던 어머닌 큰아들을 보자 무척 기뻐하셨다. 어린 나이에 절집에 들어갔다가 이젠 철들어 당신 곁에서 살려나 하는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잘해주셨다.정확히 한 주 후,“ 어머니! 저 갑니다”하고 걸망을 들고 집을 나서는 나를 보고 어머닌 망연자실하셨다. 사립문에 기대어“그렇게 가야만 하는가”한마디 하시면서 무정히 집을 떠나는 큰아들을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부모님 곁에서 잘해드리는 것은 작은
효요, 인천의 스승이 되어서 다겁생래의 모든 부모님을 해탈시키는 것은 큰 효라 했다. 출가사문이 되었으니 나태해지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큰 효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점점 자다가 일어나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문밖에 염라대왕 신발 끄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견처見處도 없으면서 알음알이 망상을 조금 더 피웠다는 이유로 가르치는 입장에 있다 보니, 오히려 공부에 소홀해진 것 같다.‘ 모든 것 놓고 무문관無門關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구나’하는생각이수시로드는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