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다스린 범종이 유현의 법음으로 사원 구석구석을 채우고 해탈의 바다로 잠을 청할 시간이다. 이제,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일어나 앉아 어둠을 안고 수행의 길을 떠날 차례다. 범종이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닫는 법구라 한다면 풍경은 밤의 휴식과그수행공간을원만히지키는뭇보살들의화신이다.
풍경은 범종의 작은 형태로 풍령風鈴또는 풍탁風鐸이라부른다.
아마 사원에 있는 장엄구 가운데 법당이나 불탑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만큼 인사성 좋고 정겨운 것은 없을것이다. 나른한 오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풍경이 딸랑딸랑 작고 예쁜 소리로 참배객에게 속삭이듯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4월 봄바람에 환한 웃음을 건네주는 것을 보면 영락없이 해맑은 어린아이를 닮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하고 반가운 순진무구한어린아이의 환한 웃음이다. 그러고 보니 어린이 포교를위해서 펴내고 있는 찬불동요집의 제목이‘풍경소리’인것도이런연유이리라.
예로부터 범종의 축소판인 요령, 금강령, 경쇠, 경자등이불교의식에사용되어왔다.
속삭이듯 다정한 풍경 소리스님들이 지니고 다녔던 요령에서 유래한 금강령 또한 작은 종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특히 법회나 강론할때 잠자고 있는 불성을 일깨워 성불로 이끄는 데 사용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불보살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도 소리를 울려내었다 하니 종 모양을 한 모든 불구는 수행자에게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모든 불보살에게 귀의하는 소리공양의 상징인 것이다.
아침저녁의 예불의식에 부전 스님이 치는 경쇠 또한 작은 종 모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엎어놓은 주발모양의 꼭지에 구멍을 뚫고 손잡이를 매달아 노루 뿔로 만든 채로 때려서 소리를 내게 되어 있다. 고대 참회 또는 철야법회의 연비의식에서 사용되기도했다.
풍경은 불교 의식구로 보지 않는다. 그저 산보하다가 대웅전을 올려다보니 하늘사이로 풍경이 보이더라, 정도로 이야기할 뿐이다. 사찰을 구성하는 미미한 장엄구 이상으로취급하지않는다.
그러나 풍경을 단순한 소리를 내는 작은 장식물 정도로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풍경의 역할은 그리 단순하지않다.
‘풍경’이야기 길로 들어서면 언제나 귓가를 맴도는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성도절을 앞두고 스님네는 일주일 용맹정진에 들어가신다고 한다. 매일매일 계속되는 철야정진에 옆에서는 퍽 퍽 뒤로 쓰러지는 스님들이 한두 분이 아니라고 한다. 스님 역시 고군분투로 생의 경계를 넘나들며 겨우겨우 버티고 있을 때, 벼락 같은 소리로 깨워주었던 것이 바로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
경소리였다는 것이다. 그 작달막한 종에서 황소 같은 우리 스님의 정신을 한순간에 깨쳐놓은 그 풍경은 분명 작고 예쁜 소리만은 아니었으리라. 그것은 바로 수행의 바른길을 열어주시는 부처님이었음이분명하다.
저녁예불로 겨울 산사가 적막으로 들어가면 풍경은 딸랑딸랑 작은 염불로 밤새 수행의 길을 떠난다. 종을울리는 방울이 물고기 모양의 금속판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물고기는 자면서도 눈을 뜨고 있다. 이것은바로 수도자의 사명, 언제까지나 늘 또렷한 눈으로 몸과마음이 깨어 수행에 임해야 한다는 경계의 말씀이요 깨달음의 채찍이리라.
범종각 안의 목어가 화려한 외모와 또렷한 눈으로 철저한 수행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처마 끝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 모양의 작은 방울은 실천수행의 오묘한 진리를 온몸으로 깨우쳐준다.
오대산에는 윗녘의 상원사와 아랫녘의 월정사가 벗을 하고 있다. 상원사 범종이 오래 되고 소리 맑기가 최고라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화려하고 정갈한 요조숙녀의 모습으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층층이 잘 다듬어빚은 아홉 단의 돌 지붕들, 그 아홉 단을 팔각으로 곱게둘러친 정성은 조그만 봄바람에도 수줍은 마음 감추지못하는 처녀가슴이다.
상원사 범종은 아침저녁으로 월정사 팔각구층탑에 주렁주렁 매달린 풍경들을 챙긴다. 상원사 범종이 울리면월정사 풍경들이 화답한다. 하루를 선문답으로 시작해 선문답으로 닫는다. 그들은 언제나 하루 두 번으로 만족한다. 상원사 범종이 선지식이라면 월정사 풍경은 부지런한 수행자의 모습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온화한 적광전 맑은 뜰 앞에앉아 있다. 아홉층 층층마다 풍경들로 멋을 낸 석탑이 바람을 탄 풍경들의 합창에 몸을 싣는다. 한적한 오후, 늦은 점심을 먹은 후 산보길 나섰다가 탑 앞에서 듣는 풍경소리는 극락정토음악에 다름아니다.
종 모양의 모든 불구는 사바세계를 극락 정토로 만드는 상징을 띠고 사원 곳곳에 존재하여 우리네 중생심의저 밑바닥에 신앙이라는 커다란 불심을 심어준다. 바람없는 월정사 뜰 앞의 풍경 소리가 이리도 그리운 것은 월정사 풍경들이 들려주는 해탈의 바다 합창곡을 아직 온전히듣지못했기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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