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는 수행을 필요치 않는다. 다만 오염汚染하지 않도록 한다. 무엇이 오염이 되는가. 다만 생사의 마음을 내고 조작하여 취향趣向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바로 오염이 된다. 만약 곧바로 그 도를알고자 한다면 평상심이 바로 도인 것이다. 평상심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是非가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凡도없고 성聖도없는것이다.시절이 바뀐 것을 자연은 더 잘 안다. 이미 입춘을 지나면 창공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에 교태가 흐르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겨우내 물렁했던 햇살에 힘이 실리기 시작하면 창을 열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습관이생겼다. 입춘맞이행사가된것이다.
대주혜해大珠慧海스님께원源율사가질문했다.
“화상은도를닦을때에공을들입니까?”
“그렇소, 공을들이지요.”
“어떻게공을들입니까?”
“배고프면밥을먹고, 피곤하면잠을잡니다.”
“다른사람들도모두그렇게하니화상과같이공을들인다고할수있겠습니다.”
“같지못하지요.”
“왜다릅니까?”
“그들은밥을먹을때는밥을먹지않고, 백천가지분별을따지며, 잠을 잘때는 잠을 자지않고 백천가지생각을일으킵니다. 그래서다릅니다.”
이것을 다시 선사들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밥은 배가 고플 때 먹는 것이고, 잠은 피곤할 때 자는 것이다.《전등록傳燈錄》으로다시돌아가보자.
또어느스님이물었다.
“어떤것이삿된것이고, 어떤것이바른것입니까?”
스님(대주혜해)께서말씀하셨다.
“마음이물건을쫓으면삿된것이요, 물건이마음을쫓으면바른것이다.”
대주혜해 스님은 조사선祖師禪의 근간을 이룬 마조도일(馬祖道一: 706~786) 스님의 제자이다. 평상심이 도라고하는것은 마조스님이 강조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종지이다.
도道는수행을필요치않는다. 다만오염汚染하지않도록한다. 무엇이오염이되는가. 다만생사의마음을
내고 조작하여 취향趣向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바로 오염이 된다. 만약 곧바로 그 도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도道는 수행을 필요치 않는다. 다만 오염汚染하지 않도록 한다. 무엇이 오염이 되는가. 다만 생사의 마음을 내고 조작하여 취향趣向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바로 오염이 된다. 만약 곧바로 그 도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이 바로 도인 것이다. 평상심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是非가없고, 취사取捨가 없고단상斷常이없으며범凡도없고성聖도없는것이다.
배고플때 밥을먹어라 심이 바로 도인 것이다. 평상심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是非가없고, 취사取捨가없고단상斷常이 없으며 범凡도없고성聖도없는것이다.
그는 평범한 언어로 조작과 분별심이 떠난 마음이 평상심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평상심은 인위적이지 않은 일상의 수행으로 얻어지며 근본을 들여다볼 때 완성되는 것이다. 선화 역시 일상의 수행으로부터 얻어진 선의 기운으로 드러나는 선미禪味가 기본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선화는 인위적으로 무엇을 그리고자 하여 그린 그림이 아닌 수행이 바탕이 된 후에야 천연으로 얻어지는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천연天然은 취사와 선택이 없는 경지이다. 그러다보니 단순하고 순수하다. 선화의 단순함은 바로여기서 비롯된것이다.
선에서 초조初祖보리달마 선사의 위상은 부처님의 정법을 전했다는 측면에서 절대적이다. 석가모니로부터 전해진 정법 안장正法眼藏의 전승자라고 하는 절대적인이미지와함께달마의서래西來과정에서의신이한 행적으로 인하여 원래 모습에 신비감을 더하였으며, 이것은 시대와 종파의 요구에 따라 그 초상肖像이 달라졌던것이다. 우리가흔히알고있는달마의모습은9세기이후선종의성립과함께체계적으로정리되었다.
한편 남종의 종조로서 달마는 중국으로 건너와 즉시 남조의 양무제와 문답하여“공덕이 없다(無功德)”의한 구절을 가르친 후 숭산 소림사에 들어가 9년 동안의 면벽수행을 하는 중, 눈 위에서 자신의 팔을 잘라 의지를 보인 제자인 혜가에게 법을 전하고 그 증명으로서 가사를 주었다. 혹은 세 사람의 제자를 제도하여, 골수와 뼈, 살의 인가를 내렸으며 북위의 불교학자들에게 독살되자 무덤에는 짚신만을 남기고 인도로 돌아갔다고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기도 하다. 선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달마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모두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두건을 둘러쓰고 눈
이 부리부리하고 매부리코를 하고 있는 활달하면서도 괴이한 모습의 몽타아주가완성되었다.
17세기 유명한 화원이었던 김명국(金明國; 1600~?)이 그린 달마 선사는 여백과 절제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그의 빠르면서도 확신에 찬 붓질은 즉각적이며 함축적인 선사들의 화두와 문답을 생각하게 한다. 옛 스승들의 문답을 보고 있노라면 한 순간의 주저함도 발견할 수 없다. 김명국의 달마도에는 이미 미추美醜를 떠나서 선의 종조로서 달마선사의 정신이 일순간에 드러나 있다. 그의 달마도는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 달마 그림의 전형이 되어왔다. 마치 달마
선사의종지가지금껏이어져내려온것에비견할수있을것이다.
지극한 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다시 생각하게된다. 지극한 도에 길이 따로 있는가 싶고, 산 정상에 다다르면 그곳이 올라온 길에 따라 다른 경지인가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혹 나는 도를 이루면 하늘을 훨훨 날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가. 혹 신통을 이루는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던가. 문득 생각난 것이 신통을 부리고,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배가 고파도 밥을 먹지 않고 피곤해도 잠을 자지 않기를삼천일하면혹되지않을까싶다. 가가呵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