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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께드렸던양말한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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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성법 2007년 02월 300호
어렸을 때부터 신비주의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원효 대사가 판대기를 던져 많은 사람들을 살린 이야기라든가 절에 들어가면 도인이 많다는 이야기가 마음속에 들어왔으니말이다.
십대 후반, 친구들과 함께 팔공산 은해사 맨 꼭대기에있던 중암에 등산을 갔을 때였다. 그곳에서 이십대 후반쯤의 아주 해맑은 모습의 스님 한 분을 만났다. 이런저런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산을 내려오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그 스님이 저 낭떠러지 밑에 가 있는 것 아닌가. 아무리 빨리 걸어도 족히20여 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축지법을 하는 스님이었다. 막연하게만 들어왔던 도에 대한신비한 이야기가 현실로 꽂히는 순간이었다. 그날 나는출가를 결정했다. 싱겁고 하찮아 보이는 일에 열을 올리며 사는 어른들의 삶에 관심이 없어서 어떤 특별한 길이없을까골똘해있을때이기도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친구 하나와 함께 동화사로 갔다.
행자 이십여 명과 함께 조석 예불하고 밥 짓고 하면서 보냈다. <치문>과 <사미율의>를 모두 외웠다. 뭐든지 일등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시절이었다. 한 해 정도를 그렇게 보내다가 해인사로 오게 되었다. 나의 사숙이 된 봉주 스님께서 해인사에 가면 도인들이 많다고 하면서 데리고간것이었다. 인연이었을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절에 가면 공중을 휙휙 날아다니는 고수들이 즐비한 줄 알았다. 해인사엔 무예의 고수들이 즐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백련암에 계시던
성철 스님도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대가 현재를 있게 했고 성철 스님이나 은사스님을 통해 진정한 불법에눈을뜨기도했으니모든게인연법이다.
해인사로 와서 1965년 7월 15일, 혜암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그리곤 곧바로 부엌으로 투입되었다.강원을 가기 위한 수순이었다. 당시는 산감을 하거나 공양간에서3개월 동안 일을 해야 강원의 방부가 이뤄졌다.
누구나 거쳐야 했던 과정이었으니, 나는 해인사에서 행자시절을 한 번 더 한 셈이다. 총림을 한다고 해서 전국에서 스님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있을 때였으니 밥과 국의 양은 굉장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국을 끓이는 갱두를했는데, 밥을 하던 공양주가 지은 밥에 돌이 들어가서 대중공사를당하기도했다.일은 많고 잠이 부족해서 힘들어하던 공양주는 한 달쯤 지나 겨울이 다가오던 어느 날 나에게,‘ 절을 떠나자’고 은근히 권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힘든데 따뜻한 부산으로 가 있자는 것이었다. 강원에는 다음에도 올 수 있다면서 도망가기를 권하는 그의 유혹을 나는 받아들이지않았고 그는 걸망을 지고 떠났다. 이미 이 절 저 절을 다니면서 행자장돌뱅이처럼 지냈던 그를 그 후 보지 못했다. 환속했을것이다.
드디어 강원에 방부를 들이고 그 이듬해 정월 보름 해제를 하고 우리 스님을 만나러 지리산 문수암으로 떠났다. 얼굴도 뵙지 못한 채‘선방에서 공부하는 수좌스님’이라는 말만 전해들은 채 수계를 했던 터라 은사스님을처음 뵈러 가는 길은 설렘 그것이었다. 문수암에서 홀로장좌불와에 일종식하며 정진하시던 스님을 찾아 떠났던, 눈이유난히도퍼부었던그날을지금도잊지못한다.
걸망 속에 가사장삼 한 벌과 양말 한 켤레를 넣고 문수암 입구까지 가니 두 갈래길이 나왔다. 한쪽 길을 택해서 걸어가는데 날이 어두워지도록 암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은사스님께드렸던양말한켤레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다시 입구까지 내려와 겨우 문수암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쯤이었다. 어느덧 눈이 그치고 달이 밝은 가운데 문수암은 조촐히 서 있었다. 굴뚝에서 솟는연기가하늘과맞닿아있는곳이었다.
가사장삼과 양말 한 켤레만 들어 있던 걸망이 어찌 그리 무겁게 느껴지는지 문수암에 이르렀을 때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종일 먹지도 못한 채 눈밭을 걸었으니 고무신속의 발은 얼어붙어 있었고 나일론처럼 얇은 겉옷은 젖어 있었다. 인기척을 냈으나 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부엌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 들여다보니 스님께서 불을 지피고 있었다. 인기척에도 돌아보지 않은 채 불만 때고 계시더니 불을 다 때고 나서야 일어서셨다. 눈이 그리도 퍼부었던 날이었으니‘어떻게 올라왔느냐’고 안부를 물으셨을 법도 하건만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신 채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가사장삼을 입고 스님께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은 아무개라고 말씀드리고 나서걸망에 넣어두었던 양말을 꺼내 스님 앞에 놓았다. 해인사에서 재를 지내고 나서 공양 받은 양말 한 켤레였다.그리고 곧바로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공부는 이렇게 해야 한다. 과거 역대 종사들께서는 공부를 이렇게 하셨다. 부처님 법은 이렇게 대단한 것이다’라는 끝없는 법문이었다.
본디 스님께서는 잠을 주무시지 않고 정진하고 계셨으니 하룻밤 새우는 거야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었으나, 종일 먹지도 못한 채 눈밭을 걸어온 나는 군불로 뜨거운방에 무릎 꿇고 앉아 법문을 듣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처음 찾아뵌 은사스님 앞에서다른 방도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난것은날이훤해져올무렵이었다.
아침 9시쯤 되어서야 스님은 뭘 좀 먹으라고 하셨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 보리밥 반 덩어리와 된장 조금, 그리고 시래기 삶아 놓은 것이 있었다. 누군가 다니러 왔던사람이 먹고 남긴 것 같았다. 시장기가 몰려왔으나 그걸먹지 못하고 물만 먹고 나왔는데, 스님은 부처님 앞에서물에 솔잎가루를 타서 마시는 것이었다. 하루에 한 번 그것이 스님의 양식이었다. 10시쯤 되자 스님께선 나무를 하러 가자고 했다. 문수암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상무주암이었는데 그곳에서 사과 한 쪽과 떡을 조금 얻어먹고 나무를 한 짐 해서 지게에 지고 내려왔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스님은 전날 저녁처럼 법문을 또 시작하시는게 아닌가. 첫인상은 냉정하고 강인해보였으나 얘기하실 땐 격의 없으셨고 이야기에 취해 기분 좋게 웃기도 하
셨다. 그렇게 또 밤을 새우고 난 다음 날, 예정에 없던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강원공부 때문에 가봐야 한다고 말이다. 여기에 있다가는 죽겠구나 싶어 일주일쯤 머물 예정이던 것을 이틀 지내고 변경한 것이었으니, 스님의 장좌불와와 하루일종식앞에 무릎을꿇었다고할까.
나의 은사스님은 성품이 대쪽 같고 사리가 분명했던 분이다. 일생을 부처님 법대로 사셨으니 강원에 다닐 때 은사스님께 옥편 한권 받은 것이 전부였다. 만약, 부처님 법을 어겨서 이 자리에서 제자가 죽는다 해도 그대로 두셨을 분이다. 일평생 화두를 놓지 않고 일로매진한 분이셨고 그 생각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은 분이다.
지리산에서도 그러셨고 나중에 퇴설당에서 홀로 문 밖을나오지 않고3년결사를 나실 때도 그랬다. 곁에서 보면서시종일관 부처님 고행하신 그 길로 가고 계시는구나 하는생각을했다.
출가하고 나서 몇 년 후 수행법에 대해 마음이 복잡해있을 때였다. 보경당 뒤 연못가를 거닐면서 스님께선 내게말씀하셨다.

“몰아붙여 공부하면서 당장 되지 않는다고 불안해 하거나흔들리지마라. 이번생에안되면다음생애에이루면 된다. 부처님께서도 그러시지 않았느냐. 나는 금생에도를 이루지 못하면 이번 생에 공부한 수행으로 해서 다음 생에 더 좋은 입장과 조건으로 출발해서 꼭 도를 이루겠다는원력으로산다. 너도그런원을세우고살아라.”

그때 내 나이 스물 몇 살이었고 나의 은사스님은 하루 일종식에 장좌불와로 일관하며 고행정진을 거듭하고 있던 사십대였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이제 예순이 넘은 세월에 와 있다. 정진이며 중생교화의 진의를 모른 채축지법을 배워 세상을 구제하리라 떠나온 출가의 길에서나는깨달았다.불법은 신비스러운 그 무엇이 아니라 가장 정상적이며 인간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본래의 마음을 회복해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부처의 마음이라고. 스승이 내게가르쳐준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