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찻잔이 하나 있다. 이것을 그냥 두면 찻잔은 찻잔이 아니다. 이것에 차를 따라 마시면 내 몸 속에 차가들어온다. 그러니이것은그제야찻잔이다.“대학교 일학년 때 어머니와 경봉 스님을 뵈러 갔어요. 그런데 스님의 첫 마디가‘너는 전생에도 스님이었으니 본생에서도 스님이 되어라’였어요. 맏아들인데다가 성악에 대한 꿈이 커서 그럴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요. 군대에 가려던 때였는데 스님은 팔십에 가까운 나이였어요. 그래서 내가 물었지요.‘ 제가 올 때까지 스님이계시겠습니까’그랬더니스님이허허웃으시대요.”
제대 후 열흘 지나 경봉 스님이 아직 계신가 싶어 찾아갔더니‘나뭇잎이 떨어지면 어디로 가느냐’하셨다. 그래서‘뿌리로 가지요’했더니‘그래 네가 뿌리로 왔다’하셨다. 그렇게 세속을 버리고 뿌리로, 원래의 집으로 와 사미계를 받았다. 세속에 있을 때 처사계는 청담 스님께 받고 화두는 대학 일학년 여름방학 때 성철 스님께받았다.
“무덥던 여름에 갔는데‘너 나한테 삼천 원 내놔라’그러시대요. 그래서 호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삼천 원을 꺼내서 드렸지요. 그런데 곁에 계시던 스님들이 막 웃으시대요. 삼천 배를 하고 오란 소리였던 거예요. 향을 삼십 개 주시더니 백번 절할 때마다 향 하나를 태우라더군요. 그렇게 삼천 배를 하는 데 아홉 시간이 걸렸어요. 그러고났더니마삼근麻三斤이란화두를주셨어요.”
오늘도들고있는화두다. 어느스님이동산수초스님께‘무엇이부처입니까?’하고묻자마침들고있던마
세근을가리켰다던이야기의그마삼근이다. 스님은그세근의마를한시도놓지않고들고있다.
“우리 노장님은 내게 물으셨어.‘ 네가 부모 태중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냐?’그런데 알 수있나. 그물음을계속풀때까지들고있는거지.”
스님이 된다는 것보다 성악의 꿈을 접어야 한다는 게 더 힘들었다. 음악을 못 듣는 것은 견딜 수 없어 읽던 책들과 들고 다니는 턴테이블과 레코드판을 가지고 절에 들어왔다. 전통적인 절집 생활을 하면서도 뒷방에가선 브람스나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 선방만 다녔다. 경봉 스님께선‘넌 책방 차리기 알맞다’하시며 강원에도 보내지 않으셨다. 공부하는 걸 보고는 강사가 되기 알맞겠으니 책 보지 말라는얘기였다. 강사가되지말고선사가돼라는얘기였다.
그런데 불국사 선방에서 한 철을 나고 마산에 다니러 갔다가 길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또다른 친구가 마산결핵병원에 있으니 같이 가보자 했다. 그런데 그 병원 안에 법당이 있어서 들여다보니 먼지만 수북이쌓여있고아무도없었다. 교회에는목사도있고신자들도많은데. 그래서스님은그곳에서한철을 나기로 결심했다. 결핵 환자들을 위해 머물기로 했다. 머물 방이 따로 없어서 법당 한쪽을 막아서 만들었다. 난방 시설이 없으니 한겨울엔 견딜 수 없이 추웠다. 그래도 어김없이 저녁마다 환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법당에 풍금이 있어서 노래도 가르쳤다. 그때 스님이 직접 작곡하고 부르고 가르쳤던 노래가 스님의1집음반의첫곡‘부처님 마음일세’라는 노래다. 그렇게 그곳에서 이년 반을 보냈다. 결핵은 옮는 것이어서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는 병인데, 스님은 이십대의 나이에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아무런 대가없이, 죽을 각오를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노래했다. 추운 바닥에서 자고 혼자서 밥을 해먹었으니 토굴생활과 다를바없는 셈이다. 그러나스님은그시절이자신의인생중가장아름다웠다고말한다.
그러고는 통도사에서 교무로 삼년을 보내다가 마치고 해인사에 다니러 갔는데 도량에서 마주친 일타 스님이 손을 잡더니‘잘 됐다, 오늘부터 해인사 교무 해라’하셨다. 그날로 해서 해인사에서 십년을 살았다. 일년간 교무를 맡다가 해인지 편집장을 맡았다. 팔십 년대 초에 한번, 그리고 팔십 년대 후반에 한번. 그렇게 사년간해인지를만들었다.
“내가있을때백호기념호를만들었는데벌써삼백호니세월이많이흘렀네요.”
처음, 해인지는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근처 고등학교의 불교학생회에 나눠주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여덟면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성철 스님 말씀이 실리니 너도 나도 보자고 해서 면수를 조금씩 늘려갔다. 그러다가 승가대학에서 하던 걸 독립적으로 키워내 잡지 형태를 제대로 갖췄다. 그때가 시명 스님이 편집장을 하던 시절이다.
“그 시절 해인지를 만드는 데 동참했던 스님들은 의식이 깨어 있던 분들이에요. 현응 스님, 향적 스님, 현장스님, 종림스님등…밤새모여서한국불교의미래에대해서탁마하고서로에게영향을주고받았죠.”
지금, 한국불교의 가장 중요한 곳에 있는 분들이다. 그렇게 해인지는 깨어 있는 의식으로 시대를 반영하며 현재까지왔다. 널리포교할수있는방법은문서포교밖에없던시절, 골동품취급되던불교를젊고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큰 역할을 한 것이 해인지다. 스님은 해인지가 하나의 큰 공간이었다고 말한다. 큰스님의 말씀을 전했고 그 시대에 맞는 내용으로 불교를 친밀하게 느끼도록 했고 미래적 시각으로 논을 펴는 자리가 되기도 했으니. 그러나 지금까지 이렇게 굳건하게 오는 동안엔 우여곡절도 많았다. 호계삼소 취재차 기자가 스님을 찾아가면 안만나주고 달아나버리거나 문전박대하는 스님들도 있었다니.
“폐간될 위기도 있었어요. 팔십 년대, 민중불교가 강세하던 시절에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글들이 실리기도했거든요.”
바쁘게 지냈다. 해인지 편집장 일을 하고 합창단을 가르치고 공연하러 다니고…. 십 년 동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해인사 생활을 마치고는 불교방송 텔레비전에서 이년 반 동안 찬불가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불교성악회’를 만들어 전국에 있는 불자 가운데 성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모여 공연도 했다. 서울, 부산, 제주도의 큰 무대뿐만이 아니라 하와이, 일본, 대만 등 해외 무대에서도 공연했다. 성철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급하게 일타 스님이 가져오신 가사에 곡을 붙여 영결식 음악도 만들었다. 그렇게 음악은스님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 머리를 깎고 절에 들 때만 해도 음악과 아주 이별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모두놓고왔는데….
“나는 솔리스트가아니고 스님입니다. 음악은 포교를위한 아주좋은 방편일뿐이에요. 내가마침노래를 할수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무대에 설때도 승복을입으니까 그자체로 포교가되더군요. 이제는 해야한다는 당위가생겨요.”
스님이 해인사에서 포교국장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다. 쉬운 불교, 누구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묵은 것이 좋을 때가 있고 새것이 좋을 때가 있다. 무조건 묵은 것을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실질적으로 다가가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스님들의 의식이 더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찬불가가 승가대학에서 학점으로 이수되어지거나 주지 연수프로그램에도 있어야 한다거나 주지스님들이 염불만이 아닌 찬불가를 통해 포교에 관심을두어야한다는것이다.
현응 스님이 해인사 승가대학의 학감으로 계실 때는 며칠씩 가서 음악 특강을 하곤 했다. 불교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강의는 물론 찬불가도 가르쳤지만, 음악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바로크, 고전, 낭만파, 현대음악까지 들려주며 가르친적이있다. 모든강원에그런날들이찾아오기를바란다.
스님의 진보적인 의식처럼 여태 스님의 몸 또한 한 곳에 오래 머문 적 없다. 노래하며 물처럼 흘러다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부산, 대구, 울산의 절을 오가며 법회를 하니 늘 걷고 또 걷는다. 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오가며 세상의 흐름을 같이 한다. 누구는 누추한 발걸음이라고 할지 몰라도 스님은 세상에서 가장 가볍게 걸을 줄 안다. 스님의 걸음에는 부처님의 노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노래를 세상과더불어부르기때문이다.
“나는장돌뱅이같아요. 이제야좀머물게된것은어머니를모시기위해서죠. 스님이출가했으면가족과연
을끊는것인데왜어머니를모시느냐할수도있지만, 갈곳없는늙은어머니를내팽개쳐서야되겠습니까.”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왕이 국사를 청했을 때 그 자리를 물리쳤다. 그것은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중이라 해도 해야 할 일은 하는,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다. 사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노인들도 품어야 하는 이들이 스님이 아닌가. 그런데 갈 곳 없는 어머니를 버리는 것이 스님이 할 일일 것인가. 그래서 스님은 지난해부터 부산에 머물며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속가 식구들과 함께 시연을 입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생각에 사가에 머물며 스님이 절에서 합창을 가르치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일한 만큼의 보수로살아가는마음은한없이편하다. 그렇게편안하게살아가고싶다.
그래서 뜻한 것은 틱낫한 스님의 플럼빌리지 같은 명상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다. 불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누구든 와서 머물 수 있는 곳, 선방 체험도 할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는 곳, 자유롭게 자신을 관조할 수 있는 공간을만들생각이다.
“불교가다른종교와달리좋은점은지나친도그마에빠지지않는다는것이죠. 그런데지금우리의절은다
가가기에너무높아요. 고개숙여몸을낮춘다고인격이낮아지는건아닌데….”
승과 속 사이에 계단을 두면 안 된다는 뜻이리라. 누구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절문으로 들어설 수 있어야한다는 말씀이리라. 그러니까 스님은 지금 진흙에서 피어나는 연꽃,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노래로절문까지꽃빛을드리우고있는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