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월간<해인> 통권300호를축하드립니다. 또한창간25주년까지….
해인사는나에게고향처럼느껴지는곳이다.
비록그곳에서태어나진않았지만마치내가태어나자란곳처럼….
어린 시절 방학 때면 누구나 한번쯤은 바닷가나 스키장 등을 떠올리며 즐거워하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로지 해인사만이 유일한피서지이며쉼터였다.
가야산 곳곳을 다니며 아버지의 옛 추억을 듣다 보면 어느덧 나는 해인사에, 그리고 가야산에 빠져서 수많은 상상을하곤 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휴가 때가 되어 바닷가에 피서를 가는 계획을 얘기하면
“피서는 산으로 가야 한다”
며가야산을추천하곤한다. 그 더운 여름날 가야산에서 밤을 지새워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을 많은 이들도 경험해봤으면 하는 이유에서이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 때쯤일 것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해인사에서 아이들을 위한 캠프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행사에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3박 4일 동안 절에서 지내면서 스님들이 생활하시는 체험을 하는 거였다. 절 밥도 먹고, 108배를 하고…. 마지막 날에는 연등을 들고 거리를 행진을 하던 기억이 난다. 그 중에서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는 체험이 있는데 어린 나이에 108배를 하는 게 힘들었는지 아직도 108배를 하던 나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된다.
그당시어린나에게1000미터달리기를하는기분이었던것같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들은 개인마다 법명을 받았다. 나의 법명은‘월광’그땐 그게 왜 그리 멋있고 뿌듯했던지…… 계속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했었다.
월광, 지금생각해보면마치무슨무협영화의주인공같았기때문이었나보다.
내가 이토록 해인사와 인연이 깊어진 이유는 나의 친할머니와 친척들이 모두 해인사가 있는 합천군 가야면에 모여살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버님도 어린 시절 해인사에서 잠시 생활하셨을 정도로 해인사와 우리 가족과의 관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그리고 현재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친척들만 그곳에 살고 있다. 해인사 약수암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지금은 추억 속에 계신 할머니이시지만 매년 그곳을 들러 내 소중한 추억 속의 할머니를만나고있다.
어린 시절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서부 정류장에서 고속버스로 2시간 남짓 산길을 오르다 보면 서울에선 볼 수 없었던수많은나무, 계곡, 가끔나타나는산짐승들……. 살아있는 그림들을 감상하다보면 어느새인가 해인사입구를 알리는 커다란문이 나타난다. 형과나는그것을 용문이라고불렀다. 문에용이그려져있고너무나도웅장해서형과내가붙인이름이다. 그곳을지나버스를내리면저멀리
서할머니의식당‘삼성식당’이바로보였다. 늘우리를너무나도반갑게맞아주시는많은분들께서계신곳이다.
그리고서울에서는귀해서먹을수없는음식이나, 있다하더라도맛이하늘과땅차이가나는여러가지를경험할수있는바로그곳이다.
가야면어느곳을 가도나를모르는분이 없었고, 아버지이름을 말하면식당에서는밥을, 슈퍼에서는과자등 맛있는 음식을 주셨다. 그러니 어린 나에게는 늘 오고 싶은 곳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분들께서 항상 웃음을 주셨고, 구수한 사투리도 나에겐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 때문인지 요즘도 사투리를 쓰는 주위의 몇몇 형들과 동생들을 보면 같이 사투리를 쓰며 장난을 하곤 한다. 그러면 다들‘고향이 어디냐’‘시골에 살았었냐’고 물었고 사투리가 자연스럽다며신기해한다.
아무튼해인사는나에게너무나도많은추억과즐거움을있게해준곳이다.
또한해인사는나에게절그리고불교를내생활의일부가될 수있도록해준곳이다. 불교를종교라는의미보다는자연스럽게 내 삶에 가르침이 되어 주었고 지금껏 인생을 사는 데 너무나도 큰 도움이 되어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게해준곳이다.
마음이답답하고하는일이잘안되고힘들때해인사에와서돌계단을오르고마음을비우고절을하며향냄새를맡다 보면 어느새 답답함과 괴로움이 거짓말처럼 날아간다. 아무런 욕심도 미움도 없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내 마음을 편하게하는것같다.
모든 일에 있어서 역행하기보다는 물 흐르는 대로 따라가자는 지금의 나의 노력도 어린 시절부터 늘 들어왔던 스님들의 말씀때문인것같다.
부족함이 너무나 많은 나로서는 늘 생각하고 명심하고 배워야 할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곳해인사는나에게있어영원히소중한곳으로내삶안에남아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