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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터엉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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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수안 / 통도사 축서암 2007년 01월 299호
열일곱 살 때부터 진주에 와 계셨던 인곡 스님께 아함경·방등경 등 경전을 배웠다. 그때는 젊은이들이 절에잘 가지 않을 때여서 우리들이 가면 스님께서 반가워하시고 사탕이나 약과 등을 나눠주시곤 했다. 사탕 등 간식이 귀할 때여서 그것을 얻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그걸 눈치 채신 스님은 내일 오면 또 주신다고 했고, 우린 경전을 배우는 재미와 함께 사탕을 얻어먹는 재미로 절을드나들었다.
하루는 약과를 주셨는데, 곁에 있던 아이가 먹지 않고호주머니에 숨겨두는 것을 보았다. 입에 들어가면 스르르 녹아버리는 맛있는 약과를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기에 왜 안 먹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어머니께 가져다드리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시려와서나도 친구 따라 잠깐 가짜배기 효자노릇을 했던 기억이난다.
당시 진주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시내를 돌면서 새벽도량석을 했다. 등을 들고 목탁을 치면서 관세음보살을 염불했다. 진주 시내를 돌고 들어오면 노보살님들이 차와떡을 내주시곤 했다. 진주 시내에 사는 한 침술사는 우리들을 위해 항상 겨울에는 따뜻한 차를, 여름에는 시원한 차를 준비해놓았다가 지나가는 우리들에게 주곤 했다.첫신앙생활을호사롭게한셈이다.
나는 절에서 숙식을 하면서 도량석도 하고 한편 개인적인 볼일도 보면서 지냈다. 정식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삭발한 채 승복을 입고 절에 살았다. 그러다가 남해 보리암엘 가게 되었는데, 그만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서머물게되었다. 비로소출가를한셈이다.남해 보리암엔 경과 율에 밝고 선사이셨던 진감 스님이 주지를 하고 계셨는데, 다른 절 스님들이 상좌를 두면 진감 스님께 보내서 경과 율을 익히고 어산을 배우도록했다.
나는 당시 어설픈 참선병에 걸려‘대선사가 되어야 할텐데 염불을 배워야 뭐하는가’하고 염불을 배울 생각을하지 않았다. 진감 스님께서‘절집에 살려면 마지밥은 내려 먹어야 한다’하시면서 나로 하여금 염불을 배우게 하셨다. 그런데 혼자 염불을 외울 때는 잘 되는데 주지스님
앞에 가서 외우려고 하면 주눅이 들어서 그런지 입이 딱-얼어붙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꾸중을 많이 들었는데, 스님께서도 자꾸 야단치는 게 안되셨던지 나중에는염불외우는것에서제외시켜주셨다. 그런데 세상에 공염불은 없다. 선방에 다니다가 이곳축서암엘 와서 한 신도분을 위한 첫 불공을 드리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남해 보리암에서는 그토록 나오지 않던 그 염불이 조르륵 풀려나오는 것 아닌가. 그때 무엇이든 열심히 해놓으면 어느 순간에 풀려 나오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왔다. 남해보리암에있을때의일이다.
후원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누군가 나를부르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광덕 스님(불광사 법주)께서 서 계시는 것이었다. 안개가 온 산에 가득하고 비가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광덕 스님은 당신 은사이신 동산 스님께서 범어사 주지를 하라고 명하셨으나 공부를 하겠다면서 보리암 위에 있는 윤필대에서 공부하고 계시던중이었다.
정진을 하시던 중 몸이 편찮으셔서 내려오신 것이었다. 스님께선 나보고 등허리를 좀 밟으라고 하셨다. 평산이 터엉빈날 수안 / 통도사 축서암 나의 행자시절 생을 병고와 싸우시면서도 정진을 멈추지 않으셨던 광덕 스님 아니신가. 그러니 젊은 날의 당시는 더 치열하게 정진하고 계셨을 텐데, 얼마나 견디기 어려우셨으면 보리암으로 내려와 일하는 나에게 등을 밟아달라고 하
셨겠는가. 그런데 참 난감했다. 신발에 물이 들어가 양말의 때와함께 내 발이 말이 아니었으니, 그 발로 어떻게 하늘 같은 스님의 등을 밟을 수 있었겠는가. 해서 손으로 등을 주물러드렸으나 그것 가지고는 안 되었다. 결국 걸레로 양말을 닦아내고 스님의 등을 발로 밟아드렸다. 그때의
송구함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인연이 되어 스님께서 훗날 많이 편찮으셔서 기운이 떨어지셨을 때몸에 좋다는 능이버섯을 가져다드리는 등 여러 번 찾아뵈었다.
승려생활을 하면서 많은 분을 존경했으나 평생을 꼿꼿하게 사셨던 보현행자 광덕 스님을 항상 흠모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을 만큼 틈이 없는 모습으로 염불을 하셨던 진상 스님도 잊을 수 없다. 그분의 축원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저절로 합장이 되었다. 설봉 스님도 선사로서 나에게는 흠모의 대상이었다.
얼마 전, 누군가‘스님께선 참선공부를 하시려고 했는데,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셨습니까?’하고 물었다. 선방에서 참선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내게 병이 온 것이 결정적 동기였을 것이다. ‘무엇이 옳다’싶으면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던 나는 참선공부를 하면서도 그성격을버리지못했다.
어느 해 겨울 안거에 들었다가 방선 시간에 졸음을 쫓는다고 1시간 이상씩 얼음 위에 있었던 것이 탈이 되어병이 생겼다. 백일 동안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얼음 위에서 있었으니 몸에 냉기가 들어 허리 밑으로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나 다리가 아프던지 선방에 앉아 가부좌를 하고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느덧 선방 상판에 앉아 있던 세월에 와 있던 내게는 시련이었다. 생각은수좌였으나현실은냉엄했다. 그렇게 선방을 나와 내가 추구했던 그 자리를 버리지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 부처님의 말씀을 형상화시키는 그림이었다. 다른 사람은 여가에 그림을 그렸으나 나는그림을‘전부’로밀어붙여수행으로삼았다.
붓을 잡고 일원상一圓相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차츰 형상이 나왔고 그 행위 자체를 법의 희열로 바꿔버린 것이다. 은사이신 불모佛母석정 스님을 시봉들면서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새벽 일찍 참선에 드셨다가 붓을 잡으시는 그 어른 곁에있으면 내가 정화됨을 느꼈다.
그림을 그리고 많은 전시회를 가지면서 한때는 탐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욕심이 끊어지지 않으면 껍데기 승려생활에 불과하다는 자각을했다.
요즘은 팔정도를 써서 벽에 붙여놓고 수시로 외우면서 실천하려고 애쓴다. 공부가 익어질수록 작품도 정직하게 나온다. 정직한 그림이라야 상대방의 마음을 열리게 할수 있다. 선화禪畵란 상대방의 닫혔던 마음을 열게 하는것, 정직할수있도록노력할것이다.
나에게 출가를 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없다. 절집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환경에 의해 삭발하고 출가해서 수십년 산 속에 있다. 고희에 가까운 지금도 그렇다.‘ 네가 승려를 하겠느냐’하고 물으면 대답 못한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부처님 전에 가서 수행자로 죽을 수 있게 해달라 는원만세우고있다.
오랜만에 행자시절을 돌아보며 옛날을 돌아보았다. 오래전, 이산승이써두었던시한수로추억을마감한다. 한모금 두모금 차茶를 따르고 우전차雨前茶 싱그런맛 입안가득 감로甘露가 담긴다 벗이라도있었다면 더욱좋으련만 해제뒷날이라 산山이터엉비었다.
‘( 산이터엉빈날’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