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바위로 가는 뒷길로 들어섰다. 며칠 전에 내린 폭설로 골짜기마다 나무 위에는 눈꽃이 피었고 외투를입은 겨울 소나무도 검은 바위와 어울려서 순백의 장관이 펼쳐졌다. 구불구불 올라가는 차도에는 다행히 눈이녹아길이나있었다. 차가몇대주차되지않은넓은주차장이 보였다. 여기서부터 걸어서올라가야 할 것 같아 차를 세웠다. 친구와 함께 걸어가는데 위쪽에도 주차장이 있는지 다른 차가 올라가고있었다. 나는나중에산에서내려 와서좀더편하게집에가기위해차를 위쪽에 주차시키는 것이 나을 것같았다. 친구에게나혼자밑에내려가서차를타고오겠다고했다.내려와서 차의 시동을 걸었다. 도무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상황이난감했다. 한두시간뒤에는해가기 울어져서 어둑해질 것인데 이 먼 산중턱에서 차가 서버리면 어떻게 집으로 가나 싶었다. 위에서 기다리고“왜,무슨일인데?”
한다. 친구의 얼굴을 대하자 내 마음은더욱 답답하고 무거워진다. 친구는최근에 힘든 일을 겪었다. 몇 달 전에 보았을 때만 해도 친구는 달덩이같은 얼굴로 방실거렸었다. 그런데하룻밤새 머리가 희어진다는 말도있다더니 짧은 기간 동안에 얼굴이폭삭 상해 있었다. 그런 친구에게나는 기분 전환이라도 될까 싶어서바람을 쐬러 나가자고 부추겼던 것이다.
갓바위에는 이십대 시절에 힘들때마다 둘이서 찾아오곤 했었다. 러닝메이트인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올라가면 차츰 정상에다다를수있었다. 산위에서바람을맞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면 우리가가지고 있던 시름이 한결 풀리곤 했었다. 친구가 결혼을 하고 서울에서 살게 되자 예전처럼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오늘 나의 제의에 친구도 옛 생각이 나던지 쉽게 가자고했다.
친구를 위로해준답시고 데려왔는데 하필이면 여기에 와서 차가 고장날 게 뭐란 말인가. 차를 바꿀 때가되었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아 자꾸만 미루고 있었다. 엔진 과열이라고생각하고 차의 보닛을 열고 냉각수를 더 채웠다. 보닛을 열어둔 채로일단 기다려보았다가 다시 시동 걸어서 안 되면 서비스를 부를 생각을했다. 이산중턱까지서비스를부를 생각을하자한숨이푹푹났다. 이곳저곳 들여다보며 마음을 졸이는 나와는 달리 친구는 만사를 초탈한 듯이 양지바른 곳을 찾아 쭈그
리고 앉는다. 나도 더 이상 어떻게할 도리가 없어서 그녀 옆에 앉아서 먼산을바라보았다. 눈이많이도왔다. 기분이좋다면한폭의동양화를 감상하는 듯 할 텐데 지금의 심정으로는 해가 져서 어둑해질까봐 걱정이다.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친구가먼저말문을연다.
“아까 저 위에서 기다릴 적에 혼자서 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생각이많아지데.”
“무슨생각?”
묻기는 했지만 친구의 심정을 짐작하고있다. 친구는남편이그동안자기 몰래 돈을 투자하여 큰 손해를낸일에대해뒷수습을할엄두를내지못하고있었다.
“나 결혼하기 전에 너와 이 산에많이 왔었잖아. 그때 그 시절도 늘힘든 문제들을 안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막막하다는거지.”
“난 뭐 문제 없니? 결혼한 형제들은 모두 타지로 떠나고 집안에 남아있는죄로집안문제를내가다뒤집어쓰고있는데.”
친구는 나를 쳐다보더니 픽 웃는다. 다 안다는 듯한 친구의 눈빛에서글퍼지고 짜증나는 이 현실에 속이더상한다.
“십 년 뒤에도 이렇게 산다면 난콱죽어버릴테다.”
친구는 내 말에 깔깔거리는 빈 웃음을 웃더니 우리도 이젠 삶을 짊어지는 나이인가보다 한다. 부모의 도움을 받던 시절이 지나고 스스로 험난한눈길을헤쳐나가야한다. 그런데이번에온눈보라는쉽지않을것같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막막하다. 결혼 후에는편히 살 것만 같던 친구에게도 시련이닥치는걸보면인생은늘새옹지마인지도 모르겠다. 삶의 길에는 언제나복병이숨어있고나쁜일은겹쳐서 오는지 피할 길도 없고 정신도못 차리게 눈덩이가 마구 굴러온다.
눈덩이에 맞고 파묻혀 어디가 길인지도모를만큼막막한심정이다.인생의 중반에 와서 또 난코스를
만났는데, 이제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때라고 생각하고 다시 처음부터시작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한걸음 한 걸음 내딛다보면 산을 오를수있겠지.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땅거미가지고있었다. 일어나서어떤조치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차에 가서 다시시동을걸어봐야겠다.운전석에 앉아 언제쯤이면 이 모든 것으로부터 헤어날까 하는 답답
함이 밀려와 마음이 울컥한다. 키를꽂았다. 아직은움직여야한다.‘크르렁’시동이 걸린다. 마음이조금개였다. 나는일말의환한마음을 가지고 저 편에서 기다리고 있는친구를 바라보았다. 일몰을 받으며외롭게 앉아 있는 친구의 모습이 힘겨워보인다.
이미 지체되어버린 시각이라 친구를 일으켜 차에 태우고 산길을 내려갔다. 친구는 창밖으로 펼쳐지는눈 덮인 산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이없어진다. 먼 산에서 쌓였던 눈들이스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는 모습이보였다.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이 풍경들을 수묵화처럼 아름답게 바라볼 수있는날이올것이라고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