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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에서어머니와함께보낸무심의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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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6년 12월 298호
언젠가 누가‘스님께서 그린 부처님의 얼굴은 엄숙하면서도 자애롭다는 평가를 받는데, 엄숙함과 자애로움이공존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아마 내가 그 물음에‘부처님의 32상相80종호 가운데 음성과 혀는 드러나지 않는데, 표현되지 않은 부분까지 그릴수있어야됩니다’라고대답했을것이다.
내가 한평생 장엄한 불국토의 화현이요, 신심의 결정체인 불화佛畵를 그리는 것으로 수행을 삼아 불화장佛畵匠이된것은저, 어렸을적어머니의영향때문이아니었을까생각해본다.
세 살에서 네 살 사이에 어머니에게 천자문千字文을배웠다. 거의 어머니하고만 살았으므로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인지 말을 좀 더듬었다고 한다. 천자문을 배우며 말을 배운 셈이고, 네 살 먹던 해 겨울에 어머니께서 백로지 백 장을 사주셨다. 어머니가 안 계신 사이 마당에 사금파리로그린그림을보고나의재능을보셨던것같다.
나의 예술적 영감이라든가 한평생을 붓을 잡을 수 있었던 원천적인 힘은 어머니의 사랑에 힘입은 바 컸을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근처에 있는봉래암에서 살았다. 나의 어머니는 마치 걸인처럼 누더기 옷을 입고 수행자처럼 사셨던 분이다. 가끔 신문기자나 동창생들이 찾아와 불공금을 놓고 가면 절대 그걸 받지 않으시곤‘나는 시주금을 안 받고도 충분히 사니까 다른 암자에 시주하세요’하시면서 절대 시주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사셨다. 내가 지금 화실을 가지고 있을 뿐, 절을가지고있지않은것도어머니의영향이크다.
두 살 먹었을 때인가 다리에 곪는 병이 났다. 얼마나심했는지 뼛조각이 다 떨어져 나왔는데, 병원에선 다리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생각하기를,‘ 내가 성치 못한 자식을 기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한 몸으로 죽게 하는 게 낫지’하고는, 병원에서 데리고 나왔다고 한다. 곁에서 누가, 무슨 곤충을 죽여서환부에 붙이면 된다고 했다. 어머닌, ‘내가 자식 생명을살리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죽일 수 없다’하시곤 그 얘기를 듣지 않으셨다. 파리나 개미 한 마리도 죽이면 안되는 것으로 아셨던 어머닌 철저하게 계율을 가지고 사셨던 분이다. 늘 마늘과 파, 고기를 안 드시고 부처님을모시면서예배하고사셨다.
불화를 그리는 것은 전생사 인연이라고 보는데, 금강산에서 살면서 항상 어머니하고 둘이 다니는데 절에 가서 탱화를 보면 그리 좋았다. 탱화를 보느라고 하루 종일들어앉아 있기도 했다. 또래 아이들과 한나절만 놀면 싫증이 났고, 스님들이나 선비들의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그렇게 애늙은이가 되어 탱화를 보는 걸 좋아했고 또 어머니가 뒷받침을 해주셨기 때문에 불화장이 되어 지금까지그림을 할수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를 북에 두고 남쪽으로 내려와 영영 만나지 못했다. 해방이 되자 이북에서는 우리가 노동자계급이 아니라고 배급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괭이와 호미도 빼앗아가려고 했다. 노동자나 농민이 아니면 호미와 괭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거였으니 얼마나혹독했겠는가. 양식이 없어 봄에 심을 종자까지도 까먹었다. 지독스럽게 일을 하셨던 어머니를 위해 촌에서 농
사 짓는 부자 한 사람이 초상화를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해서 그려주고는 종자를 전부 얻었다. 급기야 우리 두 모자가 먹을 양식이 안 되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금강산에서어머니와함께보낸무심의어린시절 어머니가권했다.
“남쪽으로 가거라. 내가 농사 지어놓을 테니 가을 지나고다시오너라.”
내가“어머니도 함께 가십시다”하고 청했으나 어머니는“나는 금강산에 들어올 때 다시는 안 나간다고 들어온사람이니 네가 들어오너라”하셨다. 가을에 다시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어머니의 사진 한 장 안 가지고 남으로 나왔는데 그후 삼팔선이 그어져 끝내 고향을 찾지 못하고스물한 살 때, 금강산에서 나온 어느 보살님으로부터 어머니가돌아가셨다는이야기를전해들었다.내가 눈물이 별로 없는데 어머니와 헤어져 남으로 오던 그날은 그렇게 눈물이 났다. 아마 다시는 어머니를 못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고 하루 천 번씩 백일 동안 지장정근을 해드렸다.
열세살 때 송광사에 가서 석두 스님을 찾아뵈었다. 서울서 부산까지 내려오는 기차에 유리창이 하나도 없어서굴 안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얼굴이 새카매졌다. 그래서였는지, ‘제가 아무개입니다’하고 인사를 드리자 스님은 당신의 피붙이인 내게“네 얼굴이 하얗고 예뻤는데시커매진 것을 보니까 돈 욕심이 많아진 모양이구나”하셨다. 세수를 하고 하룻밤을 잤는데 아침이 되자,‘ 나는여기서 밥을 얻어먹고 사는 형편이니 빨리 가거라’하시는 것 아닌가. 그러자 함께 선방에서 공부하던 분들이‘양식일랑 걱정하지 마시고 책임질 터이니 겨울을 나게하세요’라고 해서 겨우 머물게 되었다. 해방이 막 되었을때였다.
발우공양을 하는데 스님께서‘보살님들 곁에 가서 앉으라’고 했다. 참선을 하지 않는 사람은 상석에 앉을 자격이 없으므로 참선을 하는 보살님들 다음 자리에 앉으라는 것이었다. 그때 분한 생각이 들어“스님 저도 화두를 일러주세요. 참선할랍니다”하자 상석에 앉혀주셨다.그렇게 겨울을 나고 열네 살에 석두 스님을 은사스님으로출가했다.
나는 출가하자 당시 유명한 대불모大佛母였던 일섭 선생님을 만나 불화를 배우면서 어렸을 적 익혔던 그림의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은사스님은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반대하셨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수행자의 본업이 아니니, 그림은 취미로 하고 참선을 해서 견성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은사스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다. 어느 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그림 그리는 스승을 따라 다른 곳으로 가려고 채비를 하는데, 그일을 어찌 아셨는지 떠나기 전날, 은사스님께서 부르시더니,‘ 너는 천상 그림을 그려야겠구나. 내일 네 선생님을따라가거라’하시는것이었다.그러나 나는 많은 나날을 그림쟁이와 수행자 사이의길을 오갔다. 그림을 그리다가도 토굴에 들어가 참선하고, 어떤 때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좋은 옛날 책들은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내가 그린 그림은 불태우기도했다. 그림 그리는 일을 본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이다.그러다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나자 직업의식이 느껴지고 후배도 길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그게예순다섯일때였으니얼마안된것이다.
법기암에서 멀지 않은 봉래암이라는 데서 어머니하고둘이 있었는데, 어머니와 같이 가서 보면, 가끔 효봉 스님이 창문으로 잠깐 내다보곤 하셨던 기억이 난다. 작은창 하나만을 남겨둔 채 모든 구멍을 막아버린 토굴에서용맹정진하고 계셨을 때였다. 금강산은 그렇듯 내게 추억의보고寶庫인곳이다.조계종에서 신계사 복원불사를 할 때 금강산행을 권했으나 가지 않았다. 그곳은 어려서부터 성장한 곳이어서눈감고도 훤하다. 내가 살던 곳이 신계사에서5리 정도의거리인데도 정해놓은 데로만 다녀야지 마음대로 가보지못한다고 하니, 그런 입장에선 가고 싶지 않았다. 옛날에
불화를 그리는 화원 가운데 오른손을 싸매고 불화를 그린 이가 있었다. 오른손으로는 불화만 그린 것인데, 그렇듯 최선의 신심을 다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손은 어린아이의손처럼때가안묻었다고한다.불사가 없는 시간이 생기면 그때나 가려고 한다. 신계사를 책임지고 불사하는 스님에게 혹시 가능하면 우리집터를 한 번 찾아보라고 지도를 그려주었다. 반세기 이상을 묵혀두었으니 숲이 되어 있을 것이다. 법기암으로가는지도도함께그려주었다.
나의 행자시절. 아마도 나의 그리운 행자시절은 어렸을 때 금강산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낸 그 무심의 어린시절이아니었나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