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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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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적축 - 원철 1999년 02월 204호
조선족 안내원
지난해 가을중국에 갔을 때 우리 은해사 대중을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하며 통역을 맡아 수고한 준 김래웅씨는 내가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오래 만난 조선족이다. “조선족이 중국 소수 민족 가운데 문화 수준-교육 수준을 문화 수준이라고 표현했다-이 가장 높고 가장 잘 산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이백여 년 전 그 어수선한 시대에 남의 나라 땅으로 이주하여 버려지다시피 한 땅을 개척해 온 선대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를 만들 수 있었다. 연변대학만해도 설립 연도가 1949년이니 오십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셈이다. 변방인으로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자리에서 그들만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소수 민족이면서도 우리글 우리말을 쓰면서 우리 문화의 원형을 고이 간직해 온 그들의 역량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나의 관심 분야는 그 안내원이 쓰는 말이다. “우리와의 힘든 일정이 끝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했더니 “휴가를 받어서 육부치(육붙이)를 좀 사서 일단 집으로 가야죠” 하길래 “고기를 육부치라고 합니까?”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두통을 ‘골바지’라고 하고, 누군가가 말을 어물어물하는 걸 보더니 “입에 계란 물었어요?” 하였으며, 조금 싼 것을 ‘돈도 덜 팔고’ ‘더 눅어요’하는 표현들을 했다. 생경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옛 말들인지라 오히려 정감이 갔다.

한문 문화권과 한글 문화권의 매개자로서의 조선족
불교를 중국으로 소개한 사람은 인도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라 서역인이다. 교통요충지에 있는 까닭에 뛰어난 언어 감각에다가 신심까지 더해져 최초의 정전 한역자로서 그들의 의무를 다 한 덕에 불교는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었다.
한자 문화권과 한글 문화권의 매개자로서의 조선족은 새로운 의미에서 21세기 서역인이다. 그들은 중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따라서 조선족의 역할은 역경사적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지금 자본주의 소비시장으로서 또는 값싼 노동력의 제공자라는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 더욱 높은 그들의 역할을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황학루와 앵무주
운거효순雲居曉舜스님이 악저 지방으로 걸식을 갔는데 어떤 거사를 만나 질문을 받았다. 대답을 시원찮게 하여 의문을 풀어 주지 못한지라 부끄러워 부리나케 도망 오다시피 하여 스승 효총曉聰 선사에게 거사의 질문을 다시 여쭈었다.
“고경古鏡을 닦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여기에서 한양은 멀지 않다.”
“닦은 뒤에는 어떠합니까?”
“황학루黃驚樓 앞 앵무주鸚鵡洲로다.”
이 말에 효순스님은 크게 깨침을 얻었다.
부산 해운정사 진제 조실 스님도 “한 주먹으로 황학루를 거꾸러뜨리고 한 번 차서 앵무주를 뒤집는구나.”(「돌사람 쾌 웃네) 104쪽)라고 허신 법문이 있다.
법거량의 내용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황학루 앞 앵무주’ 라는 말이다. 중국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관념적인 대구對句로서 그것을 이해할 도리밖에 없다. 그러다가 ‘괜찮은 번역’ 이라는 주위의 권유로 읽던 「당시신평廣詩新評」이라는 책 속에서 최호崔顆(704~754)의 ‘황학루’라는 시를 만났다.

옛 사람은 이미 황학타고 떠났으매 昔人已乘黃鶴去
이 곳에는 부질없이 황학루만 남았구나. 此地空餘黃驚樓
황학은 한번 가서 다시 오지 않거니 黃驚-去不復返
흰구름만 천 년 동안 유유히 떠 있노라. 白雲千載空悠悠
앵무주엔 꽃 향기 풀 그윽히 우거졌네. 芳草萋萋鸚鵡洲
날은 저물어 가는데 고향은 어디런고. 日暮鄕關可處是
안개 낀 강 위에서 향수에 짖었노라. 煙波江上使人愁

원문도 원문이지만 눈이 번쩍 뜨이는 건 그 주해이다. “황학루는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지금의 무한武漢)에 양자강을 마주하여 서 있는 누각인데 「남제서南齊書·주군지州那誌」에 따르면 선인仙 왕자안王子安이,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따르면 촉한의 비위費褘가 이 곳에서 황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고 한다. 한양은 지금의 무한시武漢市 한양으로 황학루가 있는 무창과 앙자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해 보이는 무한시의 한 구역이다. 앵무주는 한양에서 서남향으로 2리 쯤 떨어진 양자강 한복판에 있는 모래톱으로 동한東漢의 미형弼衝이 여기에서 ‘앵무가鸚鵡歌를 지었는데 황조黃祖한테 살해되어 여기에 안장되면서 모래톱의 이름이 앵무주로 불리게 되었다.”(김택 「당시신평)522~523쪽) 덕분에 황학루 앵무주의 정확한 위치와 거기에 얽힌 고사를 알게 되어 적지 않은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번역자인 김택 선생은 조선족이다. 당시唐詩를 다시 번역한 까닭에 대하여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당시를 애독한 우리 민족이지만 중국의 역사, 지리, 기후 등 여러 방면의 지식이 결핍된 데다가 상당수 인용된 역사전고歷史典故를 터득하지 못한 탓과 다음다의多音多意한 중국의 한문자를 잘못 이해한 기존 번역의 오류를 시정 보완한 것”이라고 이 책을 소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인의 감각과 생활체험을 바탕으로 조선족의 언어 표현을 빌려서 우리말로 옮긴 당시 번역서라는 장점이 돋보이는 책이다.

신新의 서역서들
선사어록류 번역 때 가장 손이 자주 가는 사전인「중한사전(고려대학 민족문화 연구소) 」의 최종 교열·김수도 연변대학 박문일 교수 등 동포 학자들을 참여시켰다. 열과 성의를 다하는 그들에게서 뜨거운 동포애를 느낄 수 있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지금 조선족출신 국내 국어학박사 1호인 양오진 교수가 덕성여대 중문과에 몸 담고 있으면서 육백년 만에 발굴된 고려밀에 집필된 조선시대 외국어 전문 교육관인 사역원司譯完에서 사용하던 중국어 회화 교재인 「노걸대老乞大」 연구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불경의 번역 특히 조사어록 번역에는 조선족 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우리 불교계도 조선족과의 관계를 다양화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