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뭐하러왔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나의 행자시절 - 지도 2006년 10월 296호
대학에 다니면서 불교를 만났다. 불교학생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면서도‘반야심경’을 몰랐으나 알 수 없는신심이 있었다. 철야정진에 가서도 절을 많이 했고 앉아있기를 좋아했다. 20분 동안 좌선하고 10분 포행하는 정진을 했는데, 공부를 한다는 관념도 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대학 재학중에 간 군대에서도 나름대로 군종병으로 열심히 활동했다. 회보도 만들고 합창단도 만들었으며, 법주사 월탄 스님, 수덕사 설정 스님 등을 모셔서 법문을듣고 법회를 하기도 했다. 군종병이 되고 2개월 만에 군대내불교신도수가기독교인보다많아졌다.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으로 돌아오니 군대에 가기 전함께 진리를 얘기했던 사람들은 많이 변해 있었다. 생각이 많아졌다. 삶이란 무엇인가. 대학을 졸업하면 20대후반,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다 보면 사오십대
가 되고 하는 인생, 과연 한 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할것인가 고뇌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 늘 악몽에 시달렸고가위에눌렸다깨어나곤했다. 출가를생각했다.다니던 대학 뒤에 절이 하나 있었다. 그곳의 스님에게출가의사를 밝히자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월정사나 해인사로 가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 가방을 두고 그날 바로 집을 나왔다. 집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해인사로 가서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는 대적광전으로올라갔다. 종무실로 가서 출가의사를 밝히고 행자실로가는 게 상례였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출가란 인생을 크게 바꾸는 것 아닌가. 삼천배를 하면서 과연 내가출가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삼천배를 마칠 동안 한 번이라도 번뇌가 일어나면 출가하지않겠다는생각이었다.
3월 하순, 법당은 싸늘했다. 다행히 절을 하는 동안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법당에서 나와 지족암으로 올라갔다. 그땐 백련암의 성철 스님도 몰랐고 원당암의 혜암 스님도 몰랐다. 당시 일타 스님께서 주지이셨기 때문에 지족암으로 올라가 출가의사를 밝힐 생각이었다. 지족암으로 부지런히 발길을 옮기는데 한 스님께서 내려오다가내 발걸음이 심상찮아 보였는지‘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일타 스님을 의지해 출가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행자생활은큰절에서하는게좋으니다시내려가라고했다.그렇게 해인사 행자실로 들어갔다. 해인사에선 본디행자로 들어가면 처음 3일에서 일주일 동안 후원에 세워놓는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말도 시키지 않는다. 머리도 깎지 않고 차수를 한 채 눈만 15도 밑으로 내리깔고있어야 한다. 이 자세로 견딜 수 있어야 통과되는데 이것
을못해서대부분나가게된다.내가 수계를 할 땐 6백여 명의 행자가 거쳐갔는데 그중 12명만이 수계를 했다. 모두 중도 탈락하거나 힘들어서 다른 절에 가서 다시 행자를 하는 것이었는데, 수계할
때보니까다른절에서온낯익은얼굴이많았다.해인사 행자실의 전통은 유명하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조실스님이 두 분 계신 곳이 해인사다. 그만큼 조실행자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행자생활을 어렵게 보냈지만, 행자 때 비로소 불교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참선법도 몰랐고 군대생활 하면서도 대처승이 있는 줄 몰랐다. 승복 입은 모든 스님들이 큰스님처럼 보였으니, 그만큼순수했기때문일것이다. .삼천배를 하고 내려와 3일 만에 공양주실에 들어가 일을 했는데, 몸이 고되어서 그랬는지 일주일이 지나자 코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나 자그마한 방에서 함께 자는 30여명의 행자들은 곁에서 코피가 터져도 전혀 모른 척, 아주 냉정했다. 코피가 멈추질 않던 어느 날, 한 행자가 지압을 해주어서 가까스로 멈추었는데, 그 다음부터 모두내가 언제 해인사 일주문을 나갈지 주시했다. 그 정도가되면 모두 하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밤 9시에 취침하고 30분 지나면 살며시 일어나서(눕고 나서 30분전엔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면 안 된다) 보경당으로 갔
다. 그곳에서 절도 하고 참선도 했다. 잠을 자지 않고 생활하자 멈출 줄 모르던 코피가 멎었고 상행자들조차 말을 걸기 어려워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행자들 사이에‘저 행자는 밤에 잠도 안 자고 암자로 쏘다니고 법당에가서참선하고있다’는소문이났다.그렇게 힘들었어도 행자시절 첫날밤부터 꿈이 180도로 바뀌었다. 악몽은 사라졌다. 3년 정도 정말이지 신비스러운 꿈을 많이 꿨다. 공부하는 과정에서부터 어느 회상에서 법문하는 모습, 열반에 들어 다비하는 모습, 그리고 전생사까지 보았다. 세속에서 그리도 밤마다 악몽을꾸면서 잠을 못 이룬 것은 전생에 중노릇을 한 인연으로출가를 해야 될 때가 되었는데 출가를 하지 않고 있으니까, 출가를 시키기 위해 불법신장님들이 화현하셔서 출가하도록이끌어준것이분명하다는생각이든다.
도반들과의 교유관계도 별로 없이 무엇에도‘좋다 싫다’는 생각 없이 나름대로 열성적으로 살던 행자시절 끝무렵, 새벽부터 시작된 초파일 행사 소임을 끝내고 저녁7시쯤 걸어서 간 곳이 원당암이었다. 행자생활을 시작하고 어느 암자 한번 올라가 보지 않았으니, 물론 원당암도처음이었다. 법당에서 삼배 하고 나오니 원주채에 불이켜져있고섬돌에조그만신발한켤레가있었다.
나도 모르게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쑤욱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그마한 체구의 스님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삼배를 드리고 앉았더니 스님께서 한참 나를 바라보셨다.
그리곤“뭐 하러 왔나?”하고 물으시는데, 그 말씀 끝에아무런 생각 없이“스님을 저의 은사스님으로 모시고 계를 받고 싶습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마, 그것은우리 스님과 나의 전생사였을 것이다. 나를 한참 바라보시던 스님께서 학교라든지 나의 신변에 대해 이것저것물으시더니, 마지막으로이렇게물으셨다.“왜출가를하려고하느냐?”나는망설임없이대답했다.
“군대에 다녀와 복학하고 나서 인생을 한번 돌아봤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가정이꾸며지고 그러다 보면 나이 사오십, 육십이 되는 그런인생이 아닌, 다른 것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출가를 했습니다.”보통은‘부처가 되기 위해서, 도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스님은 뚫어지게 내 얼굴을 바라보셨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화두를 주셨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라는 화두를 주시면서스님께서그러셨다.
“부모에게 몸을 받기 전에 네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부모에게 몸을 받기 전에 존재했던 이 존재가 무엇인가자나깨나 꾸준히 의심해라. 이 화두를 들고 잘 행자생활을해라. 그런다음계를받도록해라.”처음 만나 뵙던 날 그 자리에서 행자에게 화두를 주시면서 오늘까지 출가의 길을 걷게 했던 그분은 원당암의혜암 스님이셨다. 나의 은사가 되신 혜암 스님은 정말 깨달음을 위해 혼신의 힘을 바치신 분이었다. 오로지 깨달음에 주안점을 두신 분이기 때문에 상좌들에게 차가울정도로 냉정했다. 그러나 강원 치문반에 다니면서 우리스님을 시봉했는데, 스님께선 무척 나를 아껴주셨다. 그시절 우리 스님과 종정 법전 스님 등을 모시고 용맹정진하던추억도잊을수없다.
출가해서 22년 동안 행자시절만큼 좋은 시절은 없었다. 그만큼 잘 보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좋다 나쁘다하는 그런 헤아림이 전연 없었던 것 같다. 규율을 잘 지키고 오로지 열심히 살았다. 지금까지 잘 올 수 있었던것도 분별 없던 초발심의 행자시절을 잘 보냈기 때문일것이다.
올 하안거를 마치면서 출가 후 두 번째 천일기도를 마쳤다.‘ 인욕’과‘부처님 법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공부는, 자신이 걸어간 만큼 보게 되고 해석하게 되는 것 아닌가. 저 무분별의 순수했던 행자시절의 초발심을 놓치지 않고, 다시 천일기도 하는 마음으로 정진을 멈추지 않
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