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공을흐르는바람은아직도한여름뙤약볕위에버겁게흐른다. 망설임전혀없이내려쬐는햇볕도시간
의 흐름과 맞추어 서산에 걸리듯 이 숨찬 여름도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구름은 가볍게 산을 넘다 석양과 함
께그끝에서앉아한숨을돌리고, 하늘가득붉게깔린석양은나그네의심사만부추길따름이다.
하늘은 서두르지도 않고 지체하지도 아니하며 또박또박 제 길을 걷는데, 우리네 범부의 발걸음은 그 곁에
서멈칫하기도재촉하기도하며그길가에서성인다.
하늘을앞서가도하늘은떠나지아니하고, 先天而天不違
내가그뒤에서더라도천시天時가받들일이다. 後天而奉天時
하지만 한때, 도인道人들은 하늘의 걸음걸이를 개의치 아니하였다. 노자老子역시 그런 선인 중에 하나였
으므로 이러한 당당한 풍모의 글을 남길 수 있었다. 그에겐 따로 정해진 시간이 있지 아니하였으니 천시天時
를 정하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자기 길을 갈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네 범부는 가을을 부르는 풀벌레 소리에
맞추어 수많은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마음을 서성이고 몸을 재촉해오지 아니하였던가. 이처럼 하늘은 따로
시간을정하여이것이언제다하며재촉한바가전혀없는데, 우리는무엇에의지하여마음을재촉하고몸을
서두르는것일까.
위산( 山靈祐; 772~853) 스님은 처음 백장 화상의 문하에서 원주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때 백장 화상
은대위산의주지를선발하려고하였다. 백장화상은선원의최고의위치에있는수좌의동의를구해서자신
이 수행하여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를 제시하라고 하였다. 위산과 수좌, 이 두 사람 가운데 뛰어난 사람을 선
발하여주지로추천하려고한것이다.
백장화상이드디어물병을땅위에놓고질문했다.
“이것을물병이라고불러서도안된다. 자, 그대들은이것을무엇이라고부르겠는가?”
수좌가말했다. “나무토막이라고부르지는못할것입니다.”
백장화상이다시위산에게묻자위산은물병을발로차버리고나갔다.
백장화상이웃으며말했다.
밝은눈을가진이에게이름이란그저허명虛名일뿐이다.
그러므로 물병을 물병이게 하는 것은 그 이름이 아니라 소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승이 스승이게
하는 것은 스승이란 호칭이 아니라 스승에 걸맞는 행동일 것이며, 부모가 부모일 수 있는 것은 그
이름이 아니라 역할과 사랑 때문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아니하다. 위산 스님의 발길질 한 방에 이름
과형상이일시에사라졌다.
정해진시간이어디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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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의제일수좌는위산에게졌다.”
백장화상은위산에게대위산에서선법을펼치도록명령하였다.
밝은눈을가진이에게이름이란그저허명虛名일뿐이다.
그러므로물병을물병이게하는것은그이름이아니라소용에서비롯된것이다. 스승이스승이게하는것
은 스승이란 호칭이 아니라 스승에 걸맞는 행동일 것이며, 부모가 부모일 수 있는 것은 그 이름이 아니라 역
할과사랑때문인것과크게다르지아니하다. 위산스님의발길질한방에이름과형상이일시에사라졌다.
가끔 전통은 형식에 얽매이게 한다. 하지만 전통은 겉으로 드러난 형상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그
뜻을 배울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진순(陳淳; 1483~1544)은 명나라 시대 유명한 화가이다. 그는 특히 화조
화에 능했는데, 진순과 서위(徐渭; 1521~1593)는 전통적인 화조화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소주 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으며, 당대 유명한 화가였던 문징명의 제자가 되었다. 진
순은 문징명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꼽혔으나 반듯하고(正) 우아했던(雅) 스승의 화풍과는 달리 그의 그림은
활달하고 독특했다. 그가 문징명의 다른 제자들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스승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
다는점이다.
진순이 활동하던 명대 화단은 오파吳派
의 단순하며 반듯하고 우아한 그림을 선호
하였다. 그는 이 화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필치는 보다 경쾌하고 활달하였다. 심기를
잘 드러내지 않았던 화풍 속에서도 그는 자
신의 마음과 기운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지만 그가 택한 소재는 정원의 꽃
이나 밭의 채소와 과일이었다. 이들은 세상
사를 초월한 품성과 이상을 상징한 것이기
도 하다. 진순의〈묵화조정도墨花釣艇圖〉
(卷)는 그의 담백하면서도 빼어난 필치가
돋보이는 그림이다. 이 5m가 넘는 두루마리 그림에 그는 매화와 난초, 국화와 접시꽃, 수선화, 동백, 참새,
소나무와같은화조를그리고마지막에산수를덧붙였다. 두루마리안에이처럼많은소재를차례로담는것
은남송이래내려오는하나의형식이었으나여기에산수를덧붙이는것은매우이례적인일이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그의 필법은 간결과 담백으로 귀결된다. 그림 안에서 농濃과담淡을 구분하지 않았으
며 소밀疏密의 규칙을 따르지도 않았다. 그의 눈길은 언덕 위에 앉아 앙상한 나무를 대하고 차가운 강을 내
려다보고있었으나또한무심하였다. 그는어부를기다리지않았고, 어부또한낚시질에무심하였다.
때늦은매미들이오늘하루도부지런을떨며바쁘게시작한다.
일생을 두고 열흘 남짓뿐인 그들의 노래는 진실된 것이겠으나, 그것을 담는 내 귀는 무심할 따름이다. 진
심과무심사이, 그들과나사이에는나무위와아래라는차이뿐이겠는가.
진순은 곧 강으로 내려가 어부의 낚싯대를 빼앗아 볼 일이며, 나 역시 나무로 올라가 매미와 한판 대면을
할일이다. 또하릴없는소리로날이밝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