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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를 챙기는 희망학希望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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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최재목 2006년 09월 295호
지난달의 일이다. 일본 동경에 잠시 머물면서, 잘 알려진 서점가의 한 책방에 들른 적이 있
다. 그때 문득《희망학希望學》이라는 문고본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 이제 희망이라는 녀석
도 어엿한 하나의 장르를 가지고, 학문으로 취급되는구나!’이런 생각을 하며, 관심 있는 부
분들만한번훑어보았다.
이책의 <서장序章>에는 희망 때문에 오히려 고통 받았던 사람들, 그리고 희망을 버렸기 때
문에 오히려 고통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예가 소개돼 있다. 이어서, “희망은 행
복보다는‘절망’이나‘단념’과 오히려 깊이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 그 예로, 중국의 작
가 노신(魯迅. 1881∼1936)이 그의 글 속에서 헝가리 시인 페퇴피 샹돌(Petofi Sandor. 1823
~1849)의 말을 인용하여‘절망이 허망하기는 희망과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한 것을 싣고 있
다. 노신도 페퇴피의 말에 깊이 감명하여, 삶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절망적 상황을 자력으
로물리치도록청년들을격려하기위해이러한말을남겼던것같다.
잘 알려져 있듯이, 페퇴피 샹돌은 헝가리의 애국시인이다. 그는 헝가리 독립전쟁에서 조국
을위해싸우다가코사크병사의창에찔려, 사망하기전에
라는말을남겼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이다. 탕녀蕩女는탕부蕩婦와 같은 뜻이다. 남자를 유혹하여 몸
을 파는 음탕한 여자를 말한다. ‘희망이 탕녀라니?’하고 의아해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페
퇴피의 말대로 희망(그녀)은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줄 듯 하거나 웃음을 팔거나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희망을 쫓아 일생의 진귀한 보물인 청춘을 죄다 바치고 나면 희망은 온데간데도
없이우리를버리고만다. 우리는절망한다. 이렇듯희망은허망한것이다.
그렇다면희망의상대어인절망은어떤가? 절망또한이렇게허망한희망에서나온것이니
생각해보면, 희망의 진정한 의미는 찰나의 있는 그대로에 주의·집중하는 것이다.
찰나를 응시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으면서, 막연히 내일의 희망을 구하는 것은‘저 산
너머 또 너머 저 멀리 모두들 행복이 있다 말하기에 남을 따라 나 또한 찾아갔건만
눈물지으며되돌아왔네’라는칼부세의시가가리키듯, 허깨비를쫓는것이아닐까.

당연히 허망한 것이다. 본디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 오든 가든 그대로만 바라보면 된다. 허망
한 희망의 뿌리에서 나온 절망 또한 하나의 환상이니 말이다. 그래서 페퇴피나 노신도‘절망
이허망하기는희망과마찬가지이다’라고생각했을것이다.
희망의사전적의미는, ‘어떤일을이루거나얻고자기대하고바람’이나‘좋은결과를기대
하는 마음 또는 밝은 전망’이다. 희망에 해당하는 기대·바람·전망은‘밝음’의 이미지를 갖
지만, 그것들은 언제나‘어두움’에 기대어 있다. 나아가서‘밝음’이란‘의미’를 말하고‘어두
움’은어떤‘무의미’를말할지도모른다. 그러나의미와무의미의구분이실제로그렇게명확
한 것이 아니다. 결국 희망이란 것은 유有로도 비유非有로도 정의할 수 없는 마야(Maya) 즉
환영幻影, 허깨비인것이다. 이환영은,
이라는 칼 부세(Karl Busse, 1872~1918)의 <저 산 너머>라는 시에 나타난‘행복’과도 맥을
같이한다. 모두실체가없는허깨비이다.
행복은‘복된 좋은 운수’나‘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
나 우리는 하루살이처럼 찰나를 살아간다. 매번 새로운 찰나이지만 그것이 연속된,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실체)로 생각한다. 행복은 갈망(愛)에 의해 취득된 것(取)이다. 비가 그친
뒤 물방울이 많은 대기에 햇빛이 비칠 때 나타나는 아름다운 빛깔의 반원형 호弧인‘무지개’
처럼, 대기 중 빛의 이상굴절에 의해 물체가 실제의 방향에서 벗어나 보이는 현상인‘신기루’
처럼말이다.
최근 서울 강남에서 가짜 명품시계 소동이 있었다.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
해 값싼 조립품 시계를 스위스산 고급 브랜드라 속여 고액으로 팔다 들통이 난 사기극이었
다. 아마도 당시 그 가짜 시계를 고액 명품이라 생각하고 사서 끼고 다닌 사람들은 한 순간은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가짜로 밝혀지자 그들은 곧 실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애당초 그
희망들은 이미 실망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페퇴피나 노신의 말을 바꾸어 표현한다면‘가짜
가허망하기는명품과마찬가지이다’라고나할까.
우리의 삶은 건달바성乾達婆城이 아닌가. 건달바성이란,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만을 찾
아다니는 건달바乾達婆(gandharva)가 음악과 향기로 허공에 교묘하게 지은 성이니 신기루나
환영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이름과 모습은 생성 소멸하는 이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
면그것들에얽매이지말고변화하는그대로를바라보는밝은눈을가져야한다.
생각해보면, 희망의 진정한 의미는 찰나의 있는 그대로에 주의·집중하는 것이다. 찰나를
응시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으면서, 막연히 내일의 희망을 구하는 것은‘저 산 너머 또 너머
저 멀리 모두들 행복이 있다 말하기에 남을 따라 나 또한 찾아갔건만 눈물지으며 되돌아 왔
네’라는칼부세의시가가리키듯, 허깨비를쫓는것이아닐까.
찰나에주의·집중하는것은, 배가고파서의식이흐려질때음식을먹어마음에점을찍는
(點心) 것처럼, 매순간순간을끼니챙기듯제대로챙기는것이다. 끊임없이찰나의심신을응
시한다면, 한 시공간에만 얽매여 머무르지 않고, 또한 머문다 하더라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만 매달리지 않게 된다. 일부러 희망이라 하는 환상을 만들지 않아도 생동감 있게 살
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찰나를 챙기는 것이 바로 백익무해百益無害한 하나의‘희망학’
이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