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가진백지白紙에다른사람이그림을그렸을리만무다.
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가 열 달을 품으시니 그때 내 스스로 얼굴을 그리고 그 위에 이목구비耳目
口鼻와 사지백해四肢百骸를 그려놓았다. 또한 그 이전부터 이미 내 스스로 이루어 놓은 그것을 백지 위에 그
린 그 형체에 담고자 하였다. 누구 하나 다른 사람이 있어 그곳에 보태고 감減한 바가 없이 만든 내 모습과
그 안에들여놓은마음을 두고다른 사람을탓할일이 아니다. 어머니의손을 빌려내 모습을만든 바도아니
요, 아버지가어루만져그형체를이룬것도아니다.
석가세존께서 부처를 이룬 것도 이전의 오백생을 통하여 스스로 지혜와 복덕을 닦아 이루어진 것이며, 이
우주의시작도스스로그러하여이루어진것이아니었겠는가. 그러니앞으로의길을닦는일도누가나를위
해더하고덜할일도아니다.
건봉화상(越州乾峰; 9세기)은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스님의제자이다.
스님에게어느때한스님이다음과같이질문하였다.
“온 세계(十方)의 모든 부처님은 오직 하나의 길로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였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열반의
경지를체득한하나의길이란어떤것입니까?”
건봉화상이주장자를집어들고공중에하나의선을긋고이렇게말씀하셨다.
“여기에있다.”
그뒤에그스님은운문화상에게법문을청하는기회에이문제를다시질문하였다.
운문화상은부채를집어들고서말하였다.
“이 부채는 뛰어오르면 33천의 천상에까지 뛰어올라가 제석천의 콧구멍에 붙고, 동해에 있는 잉어를 한
방치면곧바로그릇에담긴물을뒤엎은것처럼비를쏟아붓는다.”
원나라 중기에 활동하던 화가 주덕윤(朱德潤; 1294~1365)은 결국 부채를 들어 허공에 선을 그었다. 그가
붓으로 백지에 선을 그었을 때 이미 우주가 그 안에 있지 아니하였으나, 그의 절박한 마음을 다시 느껴볼 일
이다.
그는 당대 유명한 조맹부에 의해 천거되어 한림원에서 사관史官으로 일하였으나 곧 은퇴하여 강남 소주에
그는 그림 속 제題를 통하여 혼륜이라 하는 것이 모나지 않고 원이며 둥글지 않고 모난 것이라 하
며, 하늘과 땅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아무런 형체가 없었지만 형체가 존재하였고, 하늘과 땅이
생성된 후에는 형태가 존재하였으나 늘어나고 줄어들고 풀리고 감기는 일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측량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이치는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표현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노릇이다.
허공에선을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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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면서도학과유학을배우며가르쳤다.
지금도마찬가지이지만당시많은작가들은그전대前代의스승의필법을배우며, 같은풍광의산수山水와
경물景物을 통해서 은일隱逸과 같은 의지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워낙이 그 주제가 비슷하여 간혹 한 시대 한
둘의새로운필법과포치를드러낸작가들이있으면이들은선구자로분류되었다. 주덕윤역시오랜기간한
정된 주제를 반복하여 그리는 일을 지속하였으나 그의〈혼륜도渾淪圖〉에 이르러서는 다른 시도로 자연과 우
주를설명하고자하였다.
그의 작품을 보면 작품의 왼편에는 땅이 있고, 그 위에 바위를 얹었으며 바위 사이에 푸른 소나무가 자리
잡고있다. 소나무 위로는덩굴이 오르고 있지만 그 덩굴은곧 허공을 나르고 바람이되며, 허공 속의 바람은
둥근원의우주가되었다. 이렇듯작품의시선은왼쪽에서시작하여오른쪽으로움직이지만, 그이치의흐름
은 오른쪽에서 비롯되어 왼쪽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땅은 움직이지 않으나 우주는 움직이며,
바람은 움직이고 있으나 허공은 그대로이다. 그가 궁극에 그리고 싶었던 것은 땅과 바위였는지 원으로 표현
한우주였는지그의관점을알수없으니그것은모를일이다.
혼륜渾淪이란 모든 것이 뒤섞이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상태를 말하며 세상 만물의 시작이 이러했으리라 하
는 것이다. 그것을 원이라 해도 맞지 않으며 또 아무 것도 없다 하여도 맞지 않다. 그는 그림 속 제題를통하
여 혼륜이라 하는 것이 모나지 않
고 원이며 둥글지 않고 모난 것이
라 하며, 하늘과 땅이 모습을 드
러내기 전에 아무런 형체가 없었
지만 형체가 존재하였고, 하늘과
땅이 생성된 후에는 형태가 존재
하였으나 늘어나고 줄어들고 풀
리고 감기는 일이 끊임없이 계속
되어 측량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이치는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표현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노릇이다.
용담龍潭화상의 처소를 찾아간 덕산(德山宣鑑; 782~865)은 화상의 법문을 배우고 참문하는 사이에 밤이
깊었다. 용담 화상이 말하였다. “밤이 깊었는데 그대는 이제 그만 물러가는 것이 좋겠네.”덕산이 드디어 인
사를올리고발을걷어올리고문밖으로나갔다가다시들어와말했다.
“밖이캄캄하여어디가어딘지모르겠습니다.”
용담 화상은 초에 불을 붙여 덕산에게 건네주었다. 덕산이 그 촛불을 건네 받으려고 할 찰나에 용담 화상
이촛불을훅불어꺼버렸다. 덕산은그때갑자기깨닫고곧바로절을했다.
눈앞에 사물이 명확할 땐 펼쳐진 풍광에 매이기 마련이다. 말로 그 뜻을 헤아리려 하면 그 언설에 매이게
된다. 부처가알고싶으면부처가될일이며, 우주의뜻을헤아리려하면그우주와하나가되어야한다.
눈앞에는천개의촛불을켜놓고도장님이되어있으니, 결국나도촛불하나스스로끌처지는못되나보다.
천길낭떠러지로나를몰아떨어뜨리고, 깜깜한밤의지한촛불하나마저꺼주실스승이참으로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