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은 말이다. 밥만 잡수면 부처님을 쳐다보고‘나무이피타불’만한다!”
1940년대, 오대산 적멸보궁으로 기도를 하러 다니던 나의 고모는 상원사에만 다녀오면 식구들에게 그렇게 오대산 소식을 전했다.
‘나무이피타불, 나무이피타불.’
나는 뜻도 모른 채 그 소리를 가만히 따라 해보곤 했다. 고모는 또 부처님처럼 자애로우신 한암 큰스님의 모습이며 대중스님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얘기해 주곤 했다.
“한암노스님은참, 자비로우신게꼭부처님같단다.”스님들이그토록찾는부처님은대체어떤모습을하고 계실까? 자비로운 그 할아버지 스님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나는부처님의모습이그렇게궁금할수가없었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살림에도 불구하고 왜놈의 말로 공부하는 게 마땅찮은 아버지는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않았다.
“학교에 가면 뭘 하니? 왜놈말로 무슨 공부를 한다고….”
아버지의 애국심으로 인해 나는 동무들과 들로 바다로 쏘다니면서 자유롭게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마음 한쪽 구석엔‘지금 사는 여기는 갇힌 것 같고, 이 세상 밖에 아주 기가 막힌 세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외갓집에 갔더니 머리를 빡빡 깎은 이모가 와 있었다. 예전의 고운 이모 모습이 아니고 머리칼이 하나도 없는 이모는 정말 무서워 보였다. 여자가 머릴 왜 저렇게 깎았을까? 비구니스님을 난생 처음 본 나는 정면에 나서지 못하고 문 뒤에 숨어서 스물 몇 살의 이모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아, 저분을 따라가 부처님을 좀 구경했으면… ’하는데, 그 심정을 꿰뚫은 듯 이모가그랬다.
“너, 나따라갈래?”
머리칼이 하나도 없는 이모 모습이 무서워 죽겠는데도 그렇게 궁금했던 부처님을 구경하려고 앞뒤도 가리지 않고 이모를 따라나섰다. 막내 이모의 옷을 몇 벌 빌려서 보퉁이에 싸들고는 영영 세간으로 돌아오지 않을 길을 그렇게 떠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모스님과 어머니는 나를 스님으로 만든다는 약속을 했었다. 내가 팔자가 세어서 남동생이 안 자란다고, 또 세속에 두면 스무 살을 넘지 못할 사주라고 누가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모스님이 데려간 것인데, 아버지와 나만 몰랐던 것이다. 아버지께선 나중에 아시고, ‘에미 애비가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저 첩첩산중에 어린 걸 데려다 놓았다’고 야단이 났었다고 한다.
이모와 함께 탄 트럭이 눈이 펄펄 내리는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자 비로소 어머니,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로 가는 건가. 귀신에 홀려 가는가. 도깨비한테 홀려 가는 건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 이었다.
눈물을 거두고 월정거리에서 차를 내려 어둑한 길을 이모와 함께 걸어 들어갔는데, 슬픔은 어디로 물러나고 멀리서 들리는 월정사 저녁예불 소리가 천상에서 들리는 듯 기가 막혔다. ‘아, 드디어 부처님을 구경할 수 있겠구나’하고 가슴이 설레었으나 야속하게도 이모스님은 금방 부처님을 보여주지 않고 월정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장암 뒷방에 나를 놓아두더니, 사흘 째 되던 , ‘나오렴. 옆 암자에 계신 스님께 인사드리러 가자’하는 것이었다. 이모스님은 지장암 곁의 자그마한 암자로 가더니 법당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마침, 저녁예불 시간이었다. 법당문이 열리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처님을 우러러보았다. 그리곤 탄성을 질렀다.
‘오, 저걸가지고부처님이라고하는구나.’
구리로 조성해놓은 검은빛의 부처님을 바라보면서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처님이 저리 생기셨구나’하면서.
열네 살이었던 나는 그렇게 처음 부처님을 뵙고는, 어머니 아버질 잊어버린 채 지장암에 와 있던 또래 소녀들을 데리고 산으로 냇가로 쏘다니면서 노는 재미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미리 와 있던 아이들이 한 달에 한 번 있는 삭발하는 날에 머리를 파르라니 미는 걸 보면, ‘나도 깎았으면…’하는 마음에 그것이 부럽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드디어 머릴 깎는 날이왔다.
‘자, 너도머릴깎자구나….’
삭발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더구나 출가의 길이 무엇인지, 수행자의 길이 얼마나 고행의 길인지, 또 얼마나 수승한 길인지 더더욱 모른 채 머리를 깎았다. 머리를 깎았던 날, 하늘이라도 날듯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그 뜨거운 여름날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랑에 나가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물놀이를 했다. 저녁에 돌아왔더니 뜨거운 햇볕에 그간 단발머리로 가려져 있던 귀를 데어 진물이 흘렀다.
그러나 머리를 삭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바로 다음날부터 알게 되었다. 노스님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해야 했고, 선배스님들을 따라 지게를 지고 나가 나무도 하고, 도랑 옆의 큰 밭에서 풀도 뽑고 감자도 캐고 하는 날이 시작된 것이다.
‘어쨌든 중 노릇 잘하면 좋단다.’
일을 가르치면서 지장암의 총책임자인 인홍 스님(전 석남사 주지)은 그렇게 말씀했다. 일을 하는 틈틈이 글도 배웠고 또 어른스님들을 따라 몇 시간을 걸어서 올라간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의 법문을 듣기도 했다.
고모가 월정사에 다녀오면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전해주었던 한암 노스님은 참으로 인자하기 그지없으셨다. 그대로 부처님이셨다. 한번은 우리 아이들끼리 보궁에 올라가게 되었다. 어렵사리 어른스님들께 쇳대를 얻어 가지고 너무 좋와 뛰어서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데 옆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암 노스님이셨다. 가을 단풍이 들었을 때 오대산은 나무 밑이 황금빛이 난다. 한암 노스님이 그 단풍 든 나무 아래서 정진하시다가 우리가 뛰어가니까, 당신도 놀래 가지고 기침소리를 내셨던 것이다. 주장자를 터억 짚으시고 황금빛이 나는 숲속의 나무 밑에 앉아 계셨던 노스님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번은 한암 노스님을 잃어버려서 상원사 대중스님 모두가 하루 종일 찾았다. 저녁 공양 때까지도 노스님을 찾지 못해 대중이 먼저 공양을 하고는 누군가 양치질을 하다가 언덕 밑을 내려다보니 노스님께서 언덕 밑 수채에 엎드려 계신 것이었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도시락
을 먹고 밥풀을 그냥 버린 것을 주우시느라고 하루 종일 수채에 엎드려 계셨던 것이다. 노스님은 밥풀을 주워서 낱낱이 씻어 대중들과 함께 드셨다. 대처승이 살았던 큰 절과는 달리 입선과 방선을 철저히 했던 상원사의 고요한 풍경이 지금도 선하다. 지장암 노스님들도 칼날처럼 시간을 지켰음은 물론이다.
추운 오대산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밭농사가 시작되었다. 며칠 연달아 깨밭이며 팥밭을 매고 나서였다.
돌멩이 투성이인 밭을 매고 나서 양쪽 손이 벗겨지고 피가 철철 나자, 우연히 화장실 옆 자리에서 만난 이모스님이 슬그머니 떠보듯 물어 오는게 아닌가.
“너, 어디 일을 이렇게 해서 살겠니? 집에 갈래?”
나는 잠시 생각해 보곤 단호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난, 죽으면 죽었지 못가요!”
“왜?”
“삭발한 머리가 부끄러워서도 저희 집에 갈 수가 없어요.”
맨 머리가 부끄러워서도 저희 집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순수 그 자체였던 열다섯 사미니인 나는 그로부터 20여 년 뒤,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초발심의 행자 시절로 다시 돌아가게 될 운명에 처한 것이다. (계속)□
취재·글 /박원자